스킵네비게이션

밀양의 독립운동가

밀양출신 독립유공자 공훈자료

  • · 성명 박경수
  • · 생존기간 1910.02.28 ~ 미상
  • · 출생지 밀양 내이동
  • · 운동계열 국내항일
  • · 훈격(연도) 대통령표창(2020)

공적내용

1927년 8월에 조직된 밀양소년회으로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 8월 12일 창립 1주년 기념식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조사부를 담당했다. 또한 밀양청년동맹 활동을 하면서 경남청년연맹(慶南靑年聯盟) 활동도 겸했다.

박경수는 1931년 7월 조직된 밀양합동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서 간부인 한봉삼(韓鳳三) 등과 함께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자처하며 활동했다. 이들은 극심한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의 해결책으로써 공산주의 사상 연구를 도모하기로 했다. 이 일환으로 9월 20일과 9월 30일 2회에 걸쳐 밀양의 삼문리(三門里) 밀양청년동맹회관에서 만나 연구회를 결성해 각자 역할을 분담할 것을 상의했다. 또한 밀양합동노동조합 집행위원들의 지지를 얻어 연구회 조직 준비를 위해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됐다.

1933년 8월에는 함께 노동조합 및 청년동맹 활동을 하다가 죽은 한봉삼의 영면을 애도하고자 동지장의위원회(同志葬儀委員會)를 조직하고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밀양경찰서에 의해 금지당하기도 했다.

박경수는 1930년 7월 7일 당시 밀양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낙동지부(洛東支部) 설치 관련 공문이 ‘불온(不穩)’하다는 이유로 체포돼 7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어 연구회를 조직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체포돼 1931년 11월 25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밀양지청(密陽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밀양의 노동조합과 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하던 중 1932년 2월 16일부터 2월 27일까지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에서 실시한 대대적인 검거로 노동조합 간부들과 함께 체포돼 50일 동안 취조를 받았다. 또한 1933년에는 한봉삼의 동지장의(同志葬儀)를 준비하다가 체포됐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1931. 11. 25)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12. 19, 1931. 1. 22, 1932. 2. 25, 4. 14, 7. 7).
공공누리 저작권정책

만족도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 담당자 : 주민생활지원과 복지기획담당 전화 : 055-359-5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