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면은 시청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15km 떨어진 산간지역으로 옛날에는 부경 중의 태산이라 일렀고, 지금은 영남알프스라고도 불리우는 재약산(주봉1189m)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북쪽 그리고 남쪽 셋 방향으로 1000m내외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산중의 별구 이다.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서역의 중인 黃面禪師가 창건했다고 하는 표충사를 주위에 23종의 문화유산이 산재하고 있으며, 재약산 일대 자연경관과 사자평은 전국적으로 관광지로서의 명성이 높을 뿐 아니라, 4개소의 자연발생유원지를 비롯하여 곳곳에 유원지가 소재, 깊은 골과 맑은 물을 자랑하고 있다. 특산품으로 대추, 한천, 표고버섯, 맥문동이 생산되며,특히 대추와 한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생산지이며, 표고버섯과 맥문동은 밀양의 대표적인 상품이다.
동남쪽으로 계령산(桂嶺山)과 가내봉(佳來峯)이 마을을 에워싸고, 북서쪽으로 단장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독뫼인 경주산(競珠山)(216m)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아늑한 고촌이다 김해김씨,밀양박씨,여주이씨, 경주최씨, 인동장씨(7호)의 집성촌으로 주소득으로 대추, 맥문동, 벼, 노지깻잎 등을 재배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세종실록 지리지에 밀양도호부 관내에 도기소(陶器所) 한 군데가 있는데 그 소재지가 부동(府東)의 단장리라 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이존 록(彛尊錄)'에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다가 전사한 그의 외조부 박홍 신(朴弘信)의 유의(遺衣)를 묻은 가묘(假墓)가 단장리에 있다고 했다. 또 조선조 전기의 인물인 진사 변홍민(卞弘民)이 단봉정(丹鳳亭)이란 정자를 짓고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장리란 마을 이름은 조선 초기 부터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단봉정(丹鳳亭)에서 유래한 단정(丹亭)이 란 다른 이름도 전해온다. 단장(丹墻) 또는 단전(丹田)이란 지명 표기가 있 으나 이는 단장(丹場), 단정(丹亭)에서 음을 취한 것이며, 단구(丹邱, 丹丘) 또는 조양(朝陽)이란 지명은 신선이 살고 봉황이 깃 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름답게 붙인 것이다. 1890년 경에 농은(農隱) 이종곤(李鍾崑)이 입촌(入 村)하여 단구정사(丹丘精舍)를 짓고 거주지를 삼았으며, 뒤이어 금주(錦洲) 허채(許埰), 포헌(苞軒) 허대(許垈) 형제가 金海에서 이주하여 주산서당(珠 山書堂)을 세워 후진을 敎育하기도 했다. 또 같은 시기에 주운 조훈(趙勳), 동추(同樞) 김만주(金萬胄) 등도 정착함으로서 마을은 여주(驪州) 이씨, 김 해 허씨, 함안(咸安) 조씨, 김해 김씨. 밀성 박씨 등의 세거지(世居地)가 되 었다. 이 마을의 동쪽 산 너머엔 태룔리가 이웃해 있고, 북쪽과 서쪽에는 단장천, 금수(錦水)를 사이에 두고 산외면과 면계(面界)를 이루었으며, 남 쪽으로는 미촌리(美村里)와 경계가 지어졌다. 1906년 이래 단장면 사무소 의 소재지로서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그 후에 사무소를 태 용리(台龍里)로 이전한 뒤에는 그 자리를 확장하여 홍제중학교를 세워 지 금에 이르렀다. 1920년 경에 우강(宇岡) 이병래(李炳來), 계동(桂東) 이병 년(李炳年), 중와(中窩) 허석, 하인(何人) 허연(許鉛), 김문수(金文洙) 등이 동민을 규합하여 세운 조양서당(朝陽書堂)이 있었고, 참봉(參奉) 안홍원(安 弘遠)이 금수(錦水)의 남쪽에 금수정(錦水亭)을 세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그 자취만 남았다.
유물, 유적
허씨고가 : 문화재 자료 제110호로 1890년 (고종27)경에 구한말 학자 허채가 김해에서 단장면 단장리에 이거해오면서 지은 저택이다.조선조 후기 목조 기와집으로 정침과 중사랑,가묘,창고 등이 있으며,근대 유학자 허석,허섭등을 배출한 대가람이다.
주산정 : 경주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김해 허씨의 정자이며 이마을에 입촌한 후손들이 제자들을 모아 講學하돈 곳이라 하여 주산서당이라고 하였다.
단장본동(丹場本洞), 단정(丹亭) : 단장리는 본동과 창마(倉村)로 나누어져 있고, 본동은 다시 큰골(大谷), 가라골(정谷), 아래각단(下村) 등 세 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라골(험곡, 가래곡(佳來谷), 정곡면곡) : 본동의 북쪽 냇가에 있는 마을인데 가래봉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얻어진 지명이다. 또 가락(전정자)처럼 가늘고 기다란 골짜기란 뜻에서 가락골 이라고도 하며, 옛날 이 냇가에 걸인들의 수용소가 있었다하여 갈(면)골이 가라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주산정(珠山亭) : 단장 본동의 앞산인 경주산(競珠山)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김해 허씨의 정자이다. 이 마을에 입촌한 금주(錦洲) 허공(許供)이 제자들을 모아 강학(講 學)하던 곳이라 하여 주산서당이라고도 하였다. 1898년에 그 아들인 중와(中窩) 허공(許公)이 지었다.
정질미(경주산(競珠山). 慶州山) : 단장 본동 북쪽에 있는 독산로 높이 216m이다. 경주산의 음이 바뀌어 정질미가 되었는데 경주(競珠)는 구슬을 다투어 뺏는다는 뜻이다. 이 독산를 둘 러싸고 있는 산은 용암산(龍岩山), 또는 용회산(龍回山) 등 마치 용처럼 생 긴 여섯 개의 봉우리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앉은 이 산을 다투어 빼앗을 것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얽힌 전설로는 아득한 옛날에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은 마고(麻姑) 할미가 이 산을 경주에 갖다 놓기 위하여 짊어지고 가다가 등글매의 밧줄이 끊어져 이 자리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경주 산(慶州山) 또는 정질뫼, 등글메(山)라는 지명이 생겼다.
서당골(書堂谷) : 원래 이 곳은 조선조 초기에 진사 변홍민(卞弘民)이 살던 집터였으나, 1920 년경에 동민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조양서당(朝陽書堂)을 세웠다. 해 방 직후 서당은 폐쇠되었고 건물은 마을 가운데로 옮겨져 현재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양재(朝陽齋)라는 현판이 노인정에 걸려 있고 서당계(書堂 契)가 존속되고 있다. 음달산 아래쪽에 계곡을 끼고 있어 경치도 좋은 곳이다.
창마(倉村) : 단장 본동에서 태롱리 용회동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조선조 후기 이곳에 밀양부의 외동창(外東倉)을 두었다 하여 창마(倉村)가 되었다. 그 후 창고를 산외면 금곡리로 이전했으므로 구동창(舊東倉)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한 때는 단장 본동과 아울러 법정리의 이름을 구동창리 (舊東倉里)라고도 하였다. 해방 전후에는 불과 2, 3호의 주민이 마을을 지켰 으나 지금은 수십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다.
선숲(단장숲, 선수(仙藪) : 창마에서 용회동으로 건너가는 단장천 남쪽제방에 조성된 오래된 숲이다.
부엉디미에서 사당소까지 약 1000m에 이르는 긴 자연림으로 수백 년 묵은 잡목이 울창한 곳이다. 숲 한가운데로 관개용 수로가 푸르게 흘러 봄, 여름, 가을에는 동민들의 휴양처로서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신선들이 소요하는 숲이라 하여 선숲이란 지명이 생겼는데 근래에는 관광지로서도 각광을 받아 단장숲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촌마을
미촌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안법천을 사이에 두고 구미 마을과 마주 보고 있다. 마을 뒤쪽에 솟아 있는 가마봉(轎峯)을 분수령으로 하여 단장리와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으로는 들판을 끼고 안법리와 이웃하였다. 본래의 지명은 사촌이며, 일명 제초동이라 했는데 南氏와 연관이 있는 이름이다. 밀양박씨, 의령남씨, 안동손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소득원으로는 시설채소(풋고추, 깻잎 오이)단감, 축산, 벼 등이 주 소득원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사촌(士村)이란 선비의 마을이라는 뜻이 되고, 제초동(堤草洞)은 중국 송나 라 때 유현인 주희(朱熹)의 고향 무원현에 있는 남성 마을을 본 따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 곧 남씨의 자손들은 말(馬)이 풀을 뜯으며 기루어지는 사마(司馬)의 장(제초동)에서 조상의 덕업을 계승하고 말처럼 뛰어올라 출세를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밀주구지에 고인기라는 중국의 해학적인 설화 가 실려 있어 그 지명의 유래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마을은 1510년(중종5)에 판서 남지족당이 입촌한 이래 480여 년 동안 의 령 남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그 자손들이 마을 가운데 지족당 (止足堂)이란 문중 재사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중종(1506-1544)때 진사 남 우문(南右文)은 마을 앞에 침류정(枕流亭)을 짓고 살았으며, 퇴계(退溪) 선생 의 문인 조암(操庵) 남필문(南弼文)도 이 곳에서 학문을 닦았다.그 후에도 진 사 남계선(南繼善), 교수 남영길(南榮吉), 감정(監正) 남이흔(南以炘) 등이 나 서 마을을 빛냈다. 또 조선조 초기 이래 밀성 박씨도 이 곳을 세거지로 삼았 는데 부사 박시乂,첨정 박이화가 그 뿌리를 내렸다. 조선말기에 사과 박지순 (朴志淳)은 금석정(錦石亭)을 세워 문중의 터전을 굳건히 했으며, 박지열(朴 志悅)의 처인 열부 달성 서씨의 정절을 표창하는 비각도 마을에 남아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죽동의 밀성 손씨와 죽서의 일직 손씨의 일파도 이 마을 에 이거(移居)하여 세거지를 삼았다.
미촌리 서남쪽 칠탄산 아래에 있다. 마을 앞으로 안법천이 흘러 서쪽에서 단장천(동천)과 합류하는 곳이다. 마을 뒤의 산세가 거북형으로 되어 있어 이 마을이 그 꼬리에 해당한다 하여 구미라 한 곳을 구며로 표기하였고, 다시 구미(九美)가 된 것이라 한다. 또 서쪽으로 뻗은 자씨산 북쪽 산 밑을 따라 흐르고 있는 동천에는 맑은 여울과 깊은 연못, 그리고 백사장과 율림(栗林)이 펼쳐져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안동손씨,벽진이씨,김녕김씨,밀양박씨의 집성촌이며 주소득원으로 대추, 시설하우스 벼, 단감 등이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17세기 말에 발간한 밀주구지(密州舊誌)의 기록에는 이곳을 사촌리, 일명 제초동이라 하였고, 그 후 구며리와 덕성리를 합하여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삼았다. 1906년의 지방 행정 개편시에 구며를 구미(九美)로 표기하여 사촌(沙村)을 아울러 미촌리(美村里)라 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조정에 따라 덕성리를 밀양읍에 이관하고 구미, 사촌, 안법리의 일부를 병합 하여 법정리를 삼음으로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이 마을이 형성된지는 매우 오래인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겪은 이후에 효자 손지겸(孫智謙)이 복거(卜居)함으로써 일직(一直) 손씨(孫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30년대에 우석(友石) 손승헌(孫 昇憲)이 그 선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구산정(龜山亭)을 건립했다. 구한말에는 구봉(九峰) 이의택(李義澤)이 입촌하여 그 후 벽진(碧珍) 이씨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기성(岐城) 반씨(潘氏)도 이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
유물, 유적
칠탄정 : 문화재 자료 72호로 임진 왜란 때 밀양 석동산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충의를 떨친 선조때 학자 오한 손기양이 만년을 보내던 별 업으로 1844년 향중 사림 들의 주장으로 경내에 청절사를 세웠다가 그후 칠탄 서원이라 편액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칠리탄(七里灘, 七灘沼, 七灘亭), 남판서 술새미(南判書 酒泉)
안법마을
북쪽으로는 가래봉을 분수령으로 하여 미촌리, 단장리, 태용리 등 세 동리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동쪽으로 만어산의 지맥이 뻗어 내린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무릉리와 이웃해 있다. 남쪽으로도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자락 위로 감물리의 고지와 대치해 있고, 다만 서쪽 한 방향으로만 비교적 뻔한 분지를 바라보면서 법흥리와 경계를 짓고 있는 아늑한 산중 마을이다.
김해김씨, 의령남씨의 집성촌이며,그 외 밀양박씨, 경주이씨, 여주이씨, 인천채씨 등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주소득원으로 대추, 단감 시설채소, 벼가 주 소득원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1914년 지방 행정 구역 조정시에 종래의 안포동과 법귀 두 마을을 합하여 안법리라는 행정 동리를 삼았으며, 이 때 노상(路上)과 새뱅이(新坊)등 두 자연 마을도 아울러 편입시켰다.
유물, 유적
칠탄정 : 문화재 자료 72호로 임진 왜란 때 밀양 석동산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충의를 떨친 선조때 학자 오한 손기양이 만년을 보내던 별 업으로 1844년 향중 사림 들의 주장으로 경내에 청절사를 세웠다가 그후 칠탄 서원이라 편액했다.
안포동(安圃洞, 安包洞) : 안법리 서북쪽에 위치한 중심적인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환경 속에서 기름진 전포(田圃)를 가꾸며 편안하게 사는 동네라 하여 안포동 또는 안포동(安包洞)이라는 동명이 생겼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관인들이 벼 슬을 그만 두고 물러나 은거하는 마을로 알려져 왔다. 특히 구한말을 전후하 여 문과 장일포(張日抱), 집의(執義) 이승덕(李承德), 군수 손용헌(孫瑢憲), 군 수 손기복(孫基馥), 군수 홍재규(洪在圭) 등이 차례로 이 마을에 입촌했으며, 그 후에도 의령(宜寧) 남씨, 일직 손씨, 밀성 손씨, 여주 이씨, 광주 안씨 등 이 집단적으로 살았다. 마을에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이웃 마을 사촌에 살았던 진사 남순길(南順吉)의 처 광주 안씨가 피난 중 왜적에 항거 하여 순절한 사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절부광주안씨단비가 남아 있고, 의령 남씨의 문중 재실인 용연서당(龍淵書堂)이 마을 어귀에 있다.
용연산(龍淵山) : 안포동 마을 동쪽에 위치한 높은 산인데 그 기슭에 용이 잠긴 못이 있었다 하여 붙인 산 이름이다. 산 아래에는 의령 남씨 문중 재실인 용연서당(龍淵 書堂)이 있다.
법귀(法貴, 法區, 버구, 큰골, 大谷) : 안포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법초동학교를 중심으로 동과 남으로 길게 퍼져 있다. 안포(安圃), 법귀(法貴), 법산(法山)을 가리켜 옛날부터 버구삼동 이라 하였는데 법귀 또는 법구는 버구에 대한 한자음의 표기로 여겨진다. 또 이 마을 동쪽 산기슭에 큰 골짜기가 있다 하여 큰골(大谷)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구한말에 진사 남형규(南瀅圭)가 사촌(沙村)에서 이거한 후로 의령 남씨의 세거지가 되었고, 창녕 성씨, 여주 이씨, 여흥 민씨도 입촌하여 살았다.
새뱅이(新坊, 塞方, 새터, 새각단,) : 안법리 서쪽에 있는 안법초동학교 남쪽 어구 논 가운데 있는 땀의 이름이다. 약 50년 전에 이 곳에 학교가 개교된 이후에 새로 생긴 자연 마을의 하나이 다. 새로 생긴 방리(坊里)라는 뜻에서 새뱅이(新坊)또는 새터(新基), 새각단이 란 지명이 생겼다. 새방은 새뱅이의 한자음 표기이다.
안골 : 새뱅이 동쪽 산기슭에 있으며 큰들겅골짜기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안골짜 기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노상(路上) : 안법리의 서남쪽 법흥리의 법산 마을과 내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마주 보고 있다.안법리에서 감물리로 올라가는 도로의 위쪽에 있다 하여 노상 마을이라 한 것이다.
법흥마을
동으로 안법천을 두고 안법리와 이웃하였고, 서쪽으로는 자씨산(慈氏山)을 배경으로 하여 밀양시 구서원동(舊書院洞)과 시계를 이루었다. 남쪽으로는 비교적 험준한 만어산을 사이에 두고 삼랑진읍 우곡리와 면계를 지었고, 북쪽으로 산을 넘어 미촌리와 이웃해 있는 산중의 동리이다. 전반적으로 산이 에워싸고 있는 만큼 그 지대도 비교적 높은 편이며 골짜기 사이에 전개된 경지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자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 동리는 법산(法山)을 정점으로 하여 상봉(上峯) 두 자연 마을이 북, 동, 서로 솥발처럼 배치되어 있는데, 옛날부터 은자(隱者)의 동학(洞壑)이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은 곳이다.
밀성 손씨,안동 손씨,의령 남씨,밀양 박씨의 집성촌임.
주소득원: 벼가 주소득원이며 딸기, 대추, 단감 등이 생산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법산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마을이 열린 곳인데, 1914 년에 지방 행정 구역 폐합시에 사지와 상봉을 아울러서 법흥리로서 행정 리를 삼았다. 법흥이라는 동명은 법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이 함께 興하라 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유물, 유적
법흥상원놀이 : 무형문화재 제16호로 단장면 법흥 마을에서 년중 세시풍속 놀이로서 정월대보름날을 기해 마을 주민들이 당산에 모여 한 해 동안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 뒤,마을 공터에 햇불을 밝히고 달집을 불사르며 주민 개개인의 동제를 지낸뒤,마을 공터에 햇불을 밝히고 달집을 불사르면 주민 개개인의 소원성취를 기원하며, 지난 한해동안 이웃간의 갈등과 반목을 가져왔던 모든 액운을 연기와 함께 멀리 날려보낸 후 마을 주민 모두가 한데 어울려 신명나는 놀이판을 벌인다.
법산(버구) : 법흥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안법리의 노상 마을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법산은 안포(安圃), 법귀(法貴)와 함께 흔히 버구 삼동이라고 하 는데, 버구라는 지명은 버꾸(농악기)에서 온 것이라 하며 법귀(法貴) 또는 법구(法龜)로 한자음 표기를 했다. 실지로 옛날부터 버꾸놀음 건립(乞粒)이 유명하여 버구 농악의 평판이 높았다. 혹은 법산령에서 따온 지명이라고도 한다. 구한말을 전후하여 시독(侍讀) 손달원(孫達遠), 의관(議官) 손한원(孫 翰遠) 등이 터전을 잡아 일직 손씨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심정암(心淨庵)이 라는 문중재사도 있었다. 의령 남씨와 김해 김씨도 입촌하여 살았다.
용연산(龍淵山) : 안포동 마을 동쪽에 위치한 높은 산인데 그 기슭에 용이 잠긴 못이 있었다 하여 붙인 산 이름이다. 산 아래에는 의령 남씨 문중 재실인 용연서당(龍淵 書堂)이 있다.
병산등(병사등,兵使嶝,兵山嶝) : 법산 마을 북쪽에 독뫼(獨山)처럼 보이는 등성이의 이름이다. 이 등성이에 兵使의 벼슬을 한 인물의 무덤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법산들(法山坪, 큰들, 大坪) : 법산 마을 앞에 있는 들판의 이름인데, 법흥리에서 가장 큰 들이라 하여 큰 들(大坪)이라고도 한다.
상봉(上峯, 상북) : 법흥리 동남쪽 안법리와의 경계 지점에 있는 높은 지대의 산 중 마을이다. 법산에서 바라다 보면 위쪽 산봉우리 밑에 있다 하여 상봉 마을 또는 상북 마을이라 했는데 서쪽에 있는 사지 마을과 북쪽에 있는 법산 마을과는 골 짜기와 좁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삼각형으로 대치하고 있다.
옛날부터 나무 열매와 풀뿌리를 먹고살면서 산간을 떠돌아다니던 미사리들 이 이 근방에 많았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러 밀성 손씨와 의령 남씨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법산, 사지, 법귀 등과 함께 마을의 法을 정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지키고 있다.
잔치방우(婚姻岩) : 상봉 마을과 감물리와의 경계 지점에 있는 파거미산(破舊墓山)기슭의 아래쪽 길가에 있다. 옛날 임진왜란 때에 이 바위를 사이에 두고 두 마을에서 한 집 씩 피난 생활을 했다. 한 마을 집에서는 총각이 숨어살았고, 다른 한 마을에 서는 처녀가 숨어살고 있었다. 두 집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전 쟁이 끝나고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지 두 마을 처녀와 총각은 어느새 노총각, 노처녀가 되어 혼인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 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바위에다 초례청을 만들고 두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혼인 잔치 치르는 바위로 命했다는 전 설이 있다. 지금도 마을의 노총각, 노처녀들은 이 바위에서 절을 하면 빨리 혼인을 치를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국시당(國施堂, 國師堂, 國社堂) : 상봉 마을 갓등 윗머리에 서낭당이 있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하여 국 시당으로 전해 온다고 한다. 그러나 서낭당을 국사당(國師堂), 또는 국사당(國 社堂)으로 불리운데서 생긴 지명이 아닌가 한다.
당밑들(堂下坪, 당나무들) : 상봉 마을 동쪽 사이에 보이는 들판의 이름이다. 상봉에서 감물리로 가는 길은 산모퉁이를 지나 가게 되어 있는데 이 산 모퉁이 길가에 작은 돌무더기가 있 다. 이 돌무더기 옆에 당집이 있어 이 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당집 앞에 돌을 던지면 액운(厄運)을 면하고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는 민간 신 앙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당집을 중심으로 잡목이 우거져 있었으나 지금은 풍 경이 달라졌다. 이 당의 아래쪽에 있는 들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당나뭇들 이 라고도 한다.
사지마을
법흥리의 서쪽 산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비교적 넓은 골짜기와 경지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깊숙한 마을이다. 본래 이 곳의 골짜기에 모래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사지(沙地) 또는 사지(沙旨)라 하였는데 오래전부터 경전을 일구어 사람들이 살았다. 감물리에 저수지를 축조한 이후에는 모래의 유사현상(流沙現象)이 매우 줄었다고 한다. 김해김씨, 밀양박씨, 안동손씨, 경주이씨의 집성촌이며 주 소득원으로는 대추, 벼, 밤 등이 생산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법흥리의 서쪽 산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비교적 넓은 골짜기와 경지를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깊숙한 마을이다. 본래 이 곳의 골짜기에 모래가 많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사지(沙地) 또는 사지(沙旨)라 하였는데 오래전부터 경전을 일구어 사람들이 살았다. 감물리에 저수지를 축조한 이후에는 모래의 유사현상(流沙現象)이 매우 줄었다고 한다.
사지(沙旨, 沙地) : 법흥리의 서쪽 산비탈에 위치해 있으며 비교적 넓은 골짜기와 경지를 좌우 에 거느리고 있는 깊숙한 마을이다. 본래 이 곳의 골짜기에 모래가 많다 하 여 마을 이름을 사지(沙地) 또는 사지(沙旨)라 하였는데 오래전부터 경전을 일구어 사람들이 살았다. 감물리에 저수지를 축조한 이후에는 모래의 유사 현상(流沙現象)이 매우 줄었다고 한다.
초당골(草堂谷) : 사지 마을 생이덤 남쪽 골짜기의 이름인데 갓등(국시당산)과의 사이에 있다. 옛날 이곳에 어느 선비의 초당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문방우골(門岩谷) : 사지 마을 생이덤 옆에 있는 골짜기인데 문처럼 서 있는 바위가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생이덤(사운암, 생원암, 喪輿崖, 상여암)
사지 마을 초당골 위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말하는데, 산 위쪽에 들어 얹힌 층 덤의 모양이 마치 상여(喪輿)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운암 또 는 생원암이라는 이름이 있으나 생이의 변음에서 온 것이다.
구순고개(舊書院峴)
사지 마을 박성(朴姓)갓 옆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밀양시 활성 2구 구 서원으로 통한다. 구서원(舊書院)은 옛날 점필재 서원이 있던 자리라 하여 구서 원인데 지금의 활성 2구이다. 구순은 구서원의 변음이다.
만어들(萬魚坪)
사지 마을 뒷등성이 아래에 펼쳐져 있는 들 이름이다. 뒷산으로 넘어가면 만어 등(萬魚嶝)인데 만어사 산자락에 위치한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옛날에는 한 때 이곳이 만어사 관할이 되기도 했다 한다.
구기마을
동리 북쪽에 위치한 자연 마을으로 이 지대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다. 구기(舊基)는 옛날의 마을터라는 뜻인데 서북쪽산 기슭에 있는 대밭과 죽봉대, 깨밭고개등의 명소도 있다. 이 곳 계곡과 마을의 샘물이 매우 차고 달아서 감물리에 대한 지명의 유래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서북 산기슭에 있는 대뱅이(竹坊), 새뱅이(新坊) 등도 이 마을에 소속된 땀이다. 연주 현씨의 집성이며 주소득원으로 벼, 축산사육 및 노지 들깨가 재배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단장면(丹場面) 서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오지(奧地)로 지대가 높은 산중 별구(別區)이다. 동쪽으로 중첩한 산을 격하여 국전리(菊田里)와 경계를 지었고 서(西)로는 만어산 줄기를 따라 법흥리(法興里)와 삼랑진읍(三浪津 邑) 우곡리(牛谷里)에 면계를 이루고 있다. 남으로는 험준한 구천산(九川 山)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삼랑진읍(三浪津邑) 행곡리(杏谷里)와 경계 를 삼았고 북으로 새뱅이를 넘어 무릉리(武陵里)와 이웃하였다.
이곳에 취락이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란 등으로 숨어사는 사람들이 흘러 들어와 화전(火田)을 일구고 경지(耕地)를 확보하면서 이루어 놓은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샘물이 차고 달았다 하여 단물리 또는 감수(甘水)를 감물(甘勿)로 表記한데서 비롯된 지명이라 한다. 동리의 중심 지대에 몇 대의 소류지를 사이에 둔 작은 들판과 자연 마을이 구성되어 있는데 북(北), 동(東), 서(西)로 구기(舊基), 중리(中里), 용소(龍沼) 마을이 각각 삼각형(三角形) 으로 배치(配置)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비로소 이 산상 구역의 몇 개 자연 마을을 아울러서 하나의 법정리(法定里)를 삼았다. 일찍 부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연주(延州) 현씨(玄氏)가 이 동리에 터전을 잡아 세거지가 되었다. 감물지리(甘勿池里), 감물예리(甘勿池里), 감물니리 (甘勿池里), 또는 연화동(蓮花洞)이라는 별칭이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대뱅이(竹坊, 竹鳳, 竹峯), 대방고개(臺方峴)
지명유래
대뱅이(竹坊, 竹鳳, 竹峯) : 구기 마을 서북쪽 새뱅이 남쪽에 있는 땀 이름이다. 이 곳에 품질 좋은 대밭이 있었다 하여 대밭 마을이란 뜻으로 대뱅이 또는 죽방이라 하였고, 후인 (後人)들이 지명을 아름답게 붙여 죽봉(竹鳳)이라고도 했다. 또 마을 앞에는 인공(人工)으로 쌓은 것 같은 경치 좋은 자연 석대(石臺)가 있는데 이 곳 대밭에 봉(鳳)이 날아와 깃드는 곳이라 하여 죽봉대(竹鳳臺)라는 이름을 짓고 석면(石面)에 각자(刻字)를 해두었다. 지금은 대밭이 없어지고 5, 6호의 민가(民家)가 남아 있다. 마을 뒷산 이름을 죽봉산(竹鳳山) 또는 죽봉(竹峯)이라고 한다.
대방고개(臺方峴)
구기(舊基)에서 대뱅이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죽봉대(竹鳳臺)가 있는 곳이라 하여 바위 이름은 대방우(臺岩)라 하였고 등성이를 대밭등이라 하였다.
중리마을
감물리에서 가장 한가운데 위치한 자연 마을이다. 법흥리의 법산과 상봉을 통하여 들어오는 도로가 북서쪽으로 나 있는데, 들머리에는 점골(店谷)이라는 땀이 있다. 오래된 감물지(甘勿池)를 북쪽으로 바라보는 도로변 마을 입구에 감물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남쪽에는 중리 저수지를 중심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박씨,김해 김씨,임씨 등의 집성 촌으로 주소득원으로 축산사육 및 복숭, 고추, 노지들깨가 생산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단장면(丹場面) 서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오지(奧地)로 지대가 높은 산중 별구(別區)이다. 동쪽으로 중첩한 산을 격하여 국전리(菊田里)와 경계를 지었고 서(西)로는 만어산 줄기를 따라 법흥리(法興里)와 삼랑진읍(三浪津 邑) 우곡리(牛谷里)에 면계를 이루고 있다. 남으로는 험준한 구천산(九川 山)을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삼랑진읍(三浪津邑) 행곡리(杏谷里)와 경계를 삼았고 북으로 새뱅이를 넘어 무릉리(武陵里)와 이웃하였다.
이곳에 취락이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란 등으로 숨어사는 사람들이 흘러 들어와 화전(火田)을 일구고 경지(耕地)를 확보하면서 이루어 놓은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샘물이 차고 달았다 하여 단물리 또는 감수(甘水)를 감물(甘勿)로 表記한데서 비롯된 지명이라 한다. 동리의 중심 지대에 몇 대의 소류지를 사이에 둔 작은 들판과 자연 마을이 구성되어 있는데 북(北), 동(東), 서(西)로 구기(舊基), 중리(中里), 용소(龍沼) 마을이 각각 삼각형(三角形) 으로 배치(配置)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비로소 이 산상 구 역의 몇 개 자연 마을을 아울러서 하나의 법정리(法定里)를 삼았다. 일찍 부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연주(延州) 현씨(玄氏)가 이 동리에 터전을 잡아 세거지가 되었다. 감물지리(甘勿池里), 감물예리(甘勿池里) 또는 연화동(蓮花洞)이라는 별칭이 있다.
안골(內谷) : 중리 마을 뒤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간 골짜기의 이름이다. 중리 마을 안쪽에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활구부등(弓彎嶝) : 중리 마을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으로 지형이 마치 활장같이 구부등하게 휘어져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오리봉(鴨峯) : 중리 마을 어구인 뒷산의 이름인데, 오리 모양으로 생긴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연화봉(蓮花峯) : 중리 북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감물리의 주산(主山)이다. 연꽃 봉오리처럼 생긴 산이라 하여 연화봉이라 하였고, 이 산 아래쪽에 있는 동리라 하여 감물리를 연화동이라고 한다.
깨밭고개(胡麻峴) : 중리 마을 오리봉 북쪽에서 무릉리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옛날에 단장면 (丹場面) 사무소(事務所)로 내왕하는데는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고개 밑에 깨밭이 있었으므로 생긴 지명이다.
용소마을
감물리의 남쪽 산 기슭에 위치한 가장 큰 자연 마을이다. 마을 남쪽으로 구천산(九天山)이 솟아 있고 동남쪽 골짜기를 따라 당고개(堂嶺)를 넘어가면 삼랑진 우곡리(牛谷里)에 이른다. 당고개를 넘기 전에 5,6호의 고개마을이 있는데 지명은 역시 당개마이다. 밀양박씨, 함안조시 등 의 집성촌으로 주소득원으로는 축산, 과수, 벼 및 노지들깻잎, 밤 등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용소(龍沼)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옛날 마을 앞에 깊은 늪이 있었는데, 그 곳에 살고 있던 용(龍)이 물가로 나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또 용이 날아갔다는 마을 동쪽 산봉우리에는 해마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앞에는 작은 못이 남아 있는데 아무리 큰물이 지거나 가물어도 수량이 일정하다 하여 용소(龍沼) 큰 샘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점골(店谷, 정골, 鼎谷) : 감물리 들머리의 첫번째 땀 이름이다. 근처에 골짜기가 있어 땀과 함께 점골이라 부르는데 옛날 이 곳에 옹기점이 있었다고 한다. 용소 마을에 속하는 작은 마을이다. 또 솥골(鼎谷)이라는 별명이 있어 옛날에 거창(居昌) 신씨(愼 氏)가 살면서 솥을 남겼다고 한다.
각시샘 : 굴등 남쪽 비탈 중간쯤에 있는 샘이다. 옛날 전쟁 중에 굴속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어느 오누이가 있었다. 과년(過年)이 다 된 누이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굴속에서 숨어살던 어느 날 조심조심 바깥의 동정을 살피며 비탈에 있는 샘 물을 떠오기 위하여 나갔다. 그때 마침 밖에서 동정을 엿보고 있던 적병에게 발각되어 동생을 굴속에 남겨둔 채 붙잡혀 갔다. 누이는 어린 동생을 생각하고 울며불며 끌려갔다가 적병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을 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누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각시샘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있다.
큰고개(大峴) : 용소마을 꼬깔산 남쪽에 잘룩한 목이 있다. 삼랑진읍(三浪津邑) 웁실(牛谷) 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 하여 큰고개라 한다.
용소담(龍沼담) : 용소마을 큰고개 밑에 있는 땀 이름이다. 그 땀 아래에 못이 있어 용소담(龍沼潭)이라 하며 땀과 함께 아울러서 용소담이라 부르고 있다.
당고개 마을 (堂嶺村) : 점골 남쪽에 삼랑진읍(三浪津邑) 행곡(杏谷)으로 넘어가는 고개 밑에 있는 작은 마을 이름이다. 용소 마을에 속하며 5, 6호의 민가(民家)가 모여 사는 곳이다. 이 고개 밑에 당집이 있었다 하여 당고개인데 지금은 마을과 고개 이름을 함께 부르고 있다.
조산(造山) :
용소 앞들에 있는 돌무더기이다. 이 곳에 명당 자리가 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혹시 몰래 투장(偸葬)을 할까 하여 예방하는 의미에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돌을 던짐으로써 묘(墓) 같이 위장(僞裝)해 놓은 것이라 한다.
큰꼬만댕이(三峯峴, 大高嶺) : 용소에서 삼랑진읍(三浪津邑) 우곡리(牛谷里) 삼봉 안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크고 높은 만댕이(頂上)라는 뜻으로 삼봉령(三峯嶺)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또 용소 마을 남쪽에 있는 등성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국동마을
단장면(丹場面) 지역 중심부에서 남쪽 끝까지 기다란 배 모양의 형국(形局)을 한 동리(洞里)다. 북쪽에는 해발 600m의 벼락더미(雷岩峯)를 정점(頂点)으로 하여 범도리(泛棹里), 고례리(古禮里)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마치 뱃머리처럼 뾰족하게 돌출(突出)하였고 남쪽에는 표고 750m의 높은 금오산(金烏山)이 면
(面)의 최첨단이 되어 삼랑진읍, 양산시 원동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배의 꼬리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동쪽에는 완만한 만곡선(彎曲線)으로 배의 허리를 나타내며 고례리(古禮里)와 길게 인접해 있고 서쪽 또한 만곡의 선으로 반대편 뱃전을 그리면서 감물리와 이웃해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밀주지(密州誌)에는 이 곳에 진주동(進舟洞)과 동진주동(洞進舟洞)라는 마을이 있다고 했는데 동리의 평면 지형으로 보아 진주동(進舟洞)이란 지명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무릉동에서 진입하는 도로를 따라 열려 있는 서북쪽 한 방향(方向)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깊은 골짜기 사이사이에 협소한 경지와 함께 몇 개의 자연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1914년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역(區域) 개편(改編) 때 에 진주동(進舟洞)과 동진주동(洞進舟洞)를 중심으로 장재골, 갓골, 열두들 등 자연 취락을 모두 합하여 국전리라는 법정리를 삼았으며, 해방 후에 다시 편의에 따라 동(東), 서(西)로 나누고 국동(菊東)과 국서(菊西)로서 행정 마을을 개편하였다.
국화전(菊花田, 菊田) : 국화전은 북쪽으로 雷岩山(벼락드미)을 배경으로 동리(洞里)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중심 마을이라 할 수 있다. 국화전(菊花田)이란 지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곳에는 일찍부터 복잡한 세상을 멀리 한 선비들이 국화꽃을 심고 풍절을 숭상하며 사는 아늑한 마을로 전해 오는 곳이다. 오래된 마을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 숙종(肅宗) 연간(年間)에 이후종(李厚種)이라는 선비가 입촌하여 주거를 정한 후에 월성(月城) 이씨(李氏)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그 후손으로 효자(孝子) 이동순(李東順)과 이정환(李廷煥)의 처(妻)인 열녀(烈女) 양씨(梁氏)가 나서 마을의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또 1923년에는 이씨(李氏) 문중(門中)에서 그 선조(先祖)인 양평공(襄平公) 이철견(李鐵堅)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추원재(追遠齋)를 지어 보존하고 있다.
마을은 앞들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두 땅을 나누었는데 양지마(陽地)와 음지마(陰地)라 하였다.양지마는 동쪽에 있다 하여 국동(菊東)에 해당하고 음지마는 서쪽에 있다 하여 국서(菊西)에 해당하는데 행정 마을으로 삼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근처 산에 닥나무(楮)가 많아 옛날부터 국화전(菊花田)종이라는 한지(韓紙) 생산이 유명하다.
진주동(進舟洞, 晉州洞) : 진주동은 이 동리의 북쪽 들머리에 있는 옛날부터의 마을이다. 진주(進舟)라는 지명은 배가 나아간다는 뜻인데 배의 모양과 비슷한 이 동리의 지형에 들어맞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진주동(晉州洞) 혹은 진주동(進州洞)이란 지명 표기도 있으나 이는 진주동(進舟洞)에서 차음(借音)된 것이라 여겨진다. 갓골 (冠谷)과 장자골(長者谷)에서 흘러내린 물이 용포천(龍浦川)을 이루고 그 하 을 중심으로 무릉동(武陵洞)과 국화전(菊花田)을 이웃하여 비교적 넓은 들판을 마을 앞에 거느리고 있다.
금밭덩(金田嶝) : 진주동 앞산과 뒷산을 모두 가리키는 지명인데, 옛날부터 金과 銀이 나는 곳 이라 전해져 왔다.이러한 전설에 따라 일제 말기에 일본인들이 광맥을 발견 하고 이 곳에 업국화전(業菊花田)(주(株))이라는 광산(鑛山)을 차렸다. 금, 은, 동, 아연을 채굴(採掘) 정련(精練)하여 일본으로 실어 갔으며 해방후에도 얼마동안 채광을 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장자골(長者谷) : 국화전(菊花田) 동남쪽 깊은 골짜기 속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옛날에 부자 (富者)가 이 곳에 살았다 하여 장자곡이라 했는데 주민이 많을 때는 20여 호 가 넘었다고 한다. 마을 계곡이 유심하고 아름다워 그 길이가 3km나 된다고 하며 영월(寧越) 엄씨(嚴氏)의 세거지(世居地)로 전해 오는 곳이다. 마을이 좁아 10대가 넘도록 맏아들만 이 곳에 살고 지차(支次)들은 딴 곳에 가서 살게 했다고 한다.
국서마을
단장면(丹場面) 지역 중심부에서 남쪽 끝까지 기다란 배 모양의 형국(形局)을 한 동리(洞里)다. 북쪽에는 해발 600m의 벼락더미(雷岩峯)를 정점(頂点)으로 하여 범도리(泛棹里), 고례리(古禮里)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마치 뱃머리처럼 뾰족하게 돌출(突出)하였고 남쪽에는 표고 750m의 높은 금오산(金烏山)이 면
(面)의 최첨단이 되어 삼랑진읍, 양산시 원동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배의 꼬리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동쪽에는 완만한 만곡선(彎曲線)으로 배의 허리를 나타내며 고례리(古禮里)와 길게 인접해 있고 서쪽 또한 만곡의 선으로 반대편 뱃전을 그리면서 감물리와 이웃해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밀주지(密州誌)에는 이 곳에 진주동(進舟洞)과 동진주동(洞進舟洞)라는 마을이 있다고 했는데 동리의 평면 지형으로 보아 진주동(進舟洞)이란 지명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무릉동에서 진입하는 도로를 따라 열려 있는 서북쪽 한 방향(方向)을 제외하고는 주위가 높고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깊은 골짜기 사이사이에 협소한 경지와 함께 몇 개의 자연 취락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1914년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역(區域) 개편(改編)때 에 진주동(進舟洞)과 동진주동(洞進舟洞)를 중심으로 장재골, 갓골, 열두들 등 자연 취락을 모두 합하여 국전리라는 법정리를 삼았으며, 해방 후에 다시 편의에 따라 동(東), 서(西)로 나누고 국동(菊東)과 국서(菊西)로서 행정마을을 개편하였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갓골(冠谷), 텃골(基谷, 열두들, 十二皐)
지명유래
갓골(冠谷)
장자골의 서남쪽이며 국전 저수지(貯水池)의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자연 마을의 하나이다. 마을의 지형이 갓모(冠帽)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지대가 비교적 높아 옛날부터 갓골무우 등 고냉지 채소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더 들어가면 금오산 기슭에 텃골(基谷)이 있는데 갓골에 소속된 옛날의 땀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세거지라 한다.
텃골(基谷, 열두들, 十二皐)
갓골 마을 남쪽에 있는 금오산(金烏山) 기슭의 마을인데, 열두들이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주민 호수(戶數) 12집을 넘기면 마을에 재앙(災殃)이 생긴다는 전설이 있어 열두 집 이내를 유지한다는 뜻에서 열두들이라는 동명(洞名)을 붙였다고 한다. 약 50여 년 전에 어쩌다가 12집을 넘겨 13집이 살게 되었는데 그해 여름에 폭우로 산사태가 나서 마을에 큰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그 후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열두 집을 넘기는 일이 없다고 한다. 또 텃골이 개촌(開村)되기는 지금부터 350여 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앞마을인 갓골의 본래 터가 이곳이라 하여 텃골이란 지명을 남겼다.
무릉마을
단장면(丹場面)의 중심 지대에 위치한 동리(洞里)이다. 구한말(舊韓末)에 발간한 밀주지(密州誌)에는 무릉동리(武陵洞里), 지사동(智士洞), 노곡(蘆谷) 등의 방리(坊里) 이름을 표시했는데, 모두 이 동리(洞里)에 소속된 것이며 관문(官門)으로부터 30리 거리라 했다.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고 골짜기가 깊지만 비교적 수리(水利)가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많아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1914년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역(區域) 개편시(改編時)에 무릉동리(武陵 洞里)를 중심으로 노곡(蘆谷)과 지사동(智士洞)을 합하고 이웃해 있는 국 전(菊田)리, 태용리(台龍里)의 용포(龍浦)를 편입시켜 무릉리(武陵里)라는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였다 .
무릉동(武陵洞) : 무릉동은 이 동리의 중심 마을으로 다시 외무릉(外武陵)과 내무릉(內武陵)으 로 땀이 나누어져 있다. 외무릉(外武陵)(바깥무릉)은 용포천(龍浦川) 서남쪽 하천변(河川邊)에 자리 잡고 있는 큰 마을이며, 內武陵(안무릉)은 남쪽 골짜 기 깊숙한 계천변(溪川邊)의 아늑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북으로 길게 펼친 으슥한 계곡을 따라 물이 맑고 주변의 경색 이 아름다워 옛날부터 선비들이 수양하며 은거하기에 이상적인 곳으로 여겨 왔다. 마치 진(晉)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 릉도원(武陵桃源)의 별천지(別天地)와 방불(彷佛)하다 하여 이 마을의 지명 이 생겼다고 한다.
개촌(開村)의 연대(年代)는 알 수 없으나 조선조(朝鮮朝) 영조(英祖) 연간(年 間)에 사인(士人) 이유(李攸)정이 이 마을에 터를 정한 후 여주(驪州) 이씨 (李氏)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그 아우 죽와(竹窩) 이유수(李攸秀)는 문과(文 科)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아들 무릉옹(武陵翁) 이종원(李鍾元)과 초부(樵 夫) 이종용(李鍾龍) 형제(兄弟)는 무릉재(武陵齋)와 무릉서당(武陵書堂)을 짓 고 후진(後進)을 교육(敎育)하는 한편 이창(里倉)을 설치하여 빈민 구제의 공적을 남겼다.
외무릉(外武陵, 바깥무릉) : 무릉리의 본땀이라 할 수 있다.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바깥무릉 또는 외무릉이 라 한다. 태용리(台龍里)와의 경계지점에 가까운 서향 마을이다.
내무릉(內武陵, 안무릉) : 무릉(武陵) 본동, 곧 바깥무릉 남쪽에 있는 크고 긴 골짜기 마을이다. 외무릉 의 안쪽에 있다 하여 안무릉 또는 내무릉이라 한다.
용포동(龍浦洞, 龍包洞) : 외무릉 북쪽 태용리(台龍里) 경계 지점에 있는 땀 이름이다. 마을의 앞산이 용(龍)이 휘감고 있는 형국(形局)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또 땀 앞에 모래섬 이 있어 큰물이 지면 섬 둘레에 황톳물이 용트림하는 것 같다 하여 용포동 (龍浦洞)이라고도 한다. 1914년 이전에는 태용리에 소속된 땀이다.
노곡마을
단장면(丹場面)의 중심 지대에 위치한 동리(洞里)이다. 구한말(舊韓末)에 발간한 밀주지(密州誌)에는 무릉동리(武陵洞里), 지사동(智士洞), 노곡(蘆谷) 등의 방리(坊里) 이름을 표시했는데, 모두 이 동리(洞里)에 소속된 것이며 관문(官門)으로부터 30리 거리라 했다.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고 골짜기가 깊지만 비교적 수리(水利)가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많아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1914년 지방(地方) 행정(行政) 구역(區域) 개편시(改編時)에 무릉동리(武陵 洞里)를 중심으로 노곡(蘆谷)과 지사동(智士洞)을 합하고 이웃해 있는 국 전(菊田)리, 태용리(台龍里)의 용포(龍浦)를 편입시켜 무릉리(武陵里)라는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였다 .
유물, 유적
자암서당 : 문화재자료 제 149호로 1913년 소 눌 노상직 선생(1854~1931)이 망명지인 만주에서 돌아와 저술과 후진 양성을 위해 마련한 강학소, 소눌 선생은 만년에 학덕이 날로 높아 사림의 자녀들이 크게 운집하여 천 여명에 달하는 후진을 양성 시켰으며, 소 눌 문집 등 선생의 많은 저술이 이곳에서 간행되었다.
가실(갓실, 蘆谷) : 용포천(龍浦川) 동북쪽 하천(河川) 가에 자리잡은 아담한 골짜기 마을로 거 기에서 태용리(台龍里)로 나가는 길 가 마을(部落) 용포동(龍浦洞)을 합쳐 하나의 행정(行政) 마을(部落)으로 삼고 있다.
가실(갓실)이란 마을 앞 물가 습지대(濕地帶)에 갈대가 많이 난도고 하여 붙 여진 지명인데, 이 곳에서 생산되는 발(簾), 자리(席), 삿갓(笠)등은 옛날부터 평판이 있는 특산품이다. 이 마을에는 조선조(朝鮮朝) 현종(顯宗) 연간(年間) 에 참봉(參奉) 박시성(朴時聖)이 입촌(入村) 복거(卜居)한 후에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는데 1950년에 그 자손들이 선조(先祖) 인 단암(丹庵) 박언복(朴彦福)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모선재(慕先齋)를 건 립(建立)했으며, 그 이후(以後)에도 효자(孝子) 박연하(朴演夏)가 그 아버지 를 위한 노산정사(蘆山精舍)를 지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또 구한말(舊韓末) 을 전후(前後)한 시기에는 우국지사(憂國志士)인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 이 시강(侍講)의 벼슬을 그만두고 그 아우인 유학자(儒學者) 소눌(小訥) 노 상직(盧相稷)과 함께 이곳에 우거(居)를 정(定)한 후 광주(光州) 노씨(盧氏) 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대눌(大訥)은 이 마을에 풍뇌정(風雷亭)을 짓고 나라 를 근심했으며, 소눌(小訥)은 자암서당(紫岩書堂)을 세워 원근(遠近)에서 모 여 든 많은 후진(後進)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나, 지금 그 유적은 황폐하였다.
지소동(지시동, 지소동(池所洞), 지사동(智士洞), 지소동(紙所洞), 지소동(池沼洞))
외무릉(外武陵) 동남쪽에 있는 길다란 골짜기 마을이다. 옛날 이 곳에 명당 (名堂) 자리가 있었고 풍수지리(風水地理)의 명인(名人)이 살았다 하여 지사 동(智士洞) 또는 지사동(地師洞)이라 했으며, 인근(隣近) 마을(部落)인 국화전 (菊花田)과 함께 종이(韓紙)를 생산하던 곳이라 하여 지소동(紙所洞)이라 하 기도 했다. 또 마을(部落) 앞에 못과 늪이 있어 지소동(池沼洞)이라는 표기(表 記)가 있으나 일반화된 동명(洞名)은 지소동(池所洞)이라 한다.
태동마을
태룡리(台龍里)에서 주거(住居)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서남쪽에 있는 가래봉(佳來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동북(東北)으로 향해 앉은 마을인데, 남쪽 산기슭에 있었던 큰 땀이 본래의 태동(台洞)이고 그 앞쪽에 위치해 있는 현재의 본땀이 작은 태동이란 뜻에서 소태동(小台洞) 또는 소태동(小太洞)이라 하였다. 태동(台洞)이란 지명(地名)은 마을 남쪽에 있는 세 개의 봉우리, 곧 삼태산(三台山)에서 유래(由來)된 것이라 하며, 이 곳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山勢)가 크고 작은 용처럼 보인다 하여 소태동(小台洞)이라 했다는 일설도 있다. 주소득원으로 시설채소, 단감, 대추, 축산,벼가 주 소득원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태동(台洞)은 원래(元來) 조선조(朝鮮朝) 선조(宣朝) 때의 사인(士人) 김원성(金元成)이 성주(星州)에서 이주(移住)한 後(後)로 김녕(金寧) 김씨(金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는데, 후대(後代)에 침천(枕泉) 김치락(金致洛)이 살았으며 자손들이 삼태산(三台山) 아래에 태산제(台山齋)라는 추모제사(追慕齋舍)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재사(齋舍)는 중년(中年)에 없어지고 해방후(解放後)에 후손(後孫)들이 그 자리에 다시 건립(建立)하여 보존(保存)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 헌종(憲宗) 때에 만포(晩浦) 안유중(安瑜重)이 성재(省齋) 안정중(安정重), 괴천(槐泉) 안수중(安琇重)등 형제(兄弟)와 함께 부북면 (府北面) 전사포리(前沙浦里)에서 이 곳으로 옮겨 정착한 후 광주(廣州) 안씨(安氏)의 터전이 되기도 했다. 마을에는 단연정(亶然亭)이란 제사(齋 舍)와 서당(書堂)을 짓고 자질(子侄)들에게 학문(學問)과 거업(擧業)을 장 려(奬勵)하므로서 긍재(肯齋) 안효구(安孝構), 치와(恥窩) 안효완(安孝完), 소려(小廬) 안효식(安孝寔) 등 아들 삼형제(三兄弟)가 다 진사(進士)이고, 손증대(孫曾代)에서도 시헌(時軒) 안희원(安禧遠)의 문과(文科) 승지(承旨)를 비롯하여 도사(都事) 안익원(安益遠), 군수(郡守) 안장원(安璋遠), 군수 (郡守) 안종설(安鍾卨) 등 여러 사람이 사마방(司馬榜)에 올라 벼슬을 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흥암대(興岩臺), 서당곡(書堂谷)
지명유래
흥암대(興岩臺) : 태동(台洞)의 북쪽 간마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깎아지른 부엉더미(富興山) 꼭대기에 있다. 天險의 암벽을 뚫고 설치한 석벽과 계단이 지금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청일전쟁(淸日戰爭) 직후인 1896년에 태동에 거주했던 군수 안장원(安璋遠)이 그 옛날 임진왜란을 상기하여 만든 피난 시설이라 한다. 흥암 대라고 한 것은 부흥산 암벽의 조망대라는 뜻이다.
서당골(書堂谷) : 태동의 병모가지 고개 동쪽 산 중허리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옛날 이 곳에 서당이 있었다 하여 얻어진 지명이다. 서당(書堂)은 광주(廣州) 안씨(安 氏) 문중(門中)의 강학소(講學所)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연경마을
단장면(丹場面) 서북쪽에 위치한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태룡초등학교, 단장파출소, 산동농협단장지소, 단장우체국, 보건진료소, 농산물집하장 등이 있는 마을이다. 이 동리는 수리가 매우 좋은 기름진 들판을 거느리고 있다. 주소득원으로 30ha의 농경지로서 벼와 시설하우스, 한우, 돼지, 대추, 단감, 맥문동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태동(台洞)의 북쪽 들판 가운데에 있는,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단장면 행정의 중심지로서 파출소와, 우체국, 농협지소, 시장, 보건소 등 면민(面 民)들을 위한 편의시설(施設)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원래 당개(堂 浦)라 했는데 북쪽 강가에 기다란 숲 속에 당집(堂)이 있었고, 사연리(泗淵 里)로 건너가는 넓은 냇가의 갯마을이었다. 일제(日帝) 때 이 갯가에 방축을 쌓고 건너 마을 앞을 지나던 도로를 경찰(警察) 주재소와 5일장을 유치했다.
그 후 인근 주민들이 점차 모여들어 신생(新生) 마을(部落)으로 발전하면서 단장리에 있었던 면사무소까지 이 곳으로 이전했다. 연경(淵鏡)이란 지명은 애초에 구연경(舊淵鏡), 곧 지금의 용회동(龍回洞) 구장터를 가리킨 것이었으나 5일장을 옮긴 후 당포(堂浦)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마을 북쪽의 냇물이 흘러가면서 웅연(熊淵), 당연(堂淵), 사연(泗淵), 경호(鏡湖) 등 곳곳에 아름다운 연못을 이루었고 그 청명하기가 거울과 같다 하여 연경(淵鏡)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용회동(龍回洞, 會洞里), 구연경(舊淵鏡), 들말(들마, 野村)
지명유래
용회동(龍回洞, 會洞里) : 연경의 서북쪽 단장천 건너편에 있는 옛 마을이다. 북쪽으로 승학산(乘鶴 山)을 등에 지고 남향하여 앉은 용회(龍回) 본땀과 호정산(虎頂山) 기슭에 자리 잡은 구연경 등 두 땀으로 이루어져 있다.
1910년대에 개설한 표충사행(表忠寺行) 지방 도로가 지금과는 달리 단장리에서 내를 건너 용회(龍回) 본땀 앞을 지나 사연리(泗淵里)를 통과했을 당시에는 신작로 가의 마을으로 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5일장을 둔 면내의 번잡한 장터거리였다.
용회동이란 서쪽 정면에 독뫼인 경주산(競珠山)을 사이에 두고 그 너머에 용암산(龍岩山)과 서로 구슬을 차지하고자 다투는 형상을 빗대어 용(龍)처럼 휘감겨진 마을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또 회동리(會洞里)는 용회동(龍回洞)의 발음(發音)을 줄여 회동(會洞)이라 표기(表記)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장터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라고도 한다.
구연경(舊淵鏡) : 용회동 동쪽에 있는 옛날 장터이다. 1910년대에 이 마을 앞으로 표충사행 신작로가 나고 시장이 서서 면내에서는 가장 번잡한 저자 거리였다. 시장이 지금의 연경 마을로 옮겨 간 후에도 오랜 동안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들마 : 태동과 연경 사이에 있는,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간마산 아랫쪽에 있는 구도로(舊道路) 옆에 있으며 사연리에 속하는 밭말(田旨)을 동쪽에 두고 있는 신생(新生)마을이다. 태동과 들말 사이에는 무릉천(武陵川)이 가로 놓여 있고 그 냇가에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있다.
사연마을
단장천 서쪽 정각산 줄기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강 건너에 동화전 마을과 마주 보고 있다. 재약천(九川)과 고사천(竹岩川)의 물이 범도리에서 합류하여 흘러내린 모래가 쌓여 강바닥이 넓어지고 높아져서 지금의 태용사평(台龍四坪)을 비롯한 마을 앞 일대의 들판을 거의 충적토(沖積土)로 메웠으며, 물이 부딪쳐 흐르는 요소 마다 자연적인 연못이 이루어졌다. 반계연(盤溪淵), 웅연(熊淵), 당연(堂淵), 호정연(虎頂淵) 등의 지명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이 마을을 애초에 사연이라 한 것도 모래와 연못이 많은 아름다운 촌락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사연(泗淵)이란 지명은 사연(沙淵)의 음(音)을 표기하면서 사수(泗水) 또는 사빈(泗濱)으로 아화(雅化)하여 이 곳에 정거(定居)한 선비들이 붙였다고 한다. 사연(泗淵)은 본동 이외에 북쪽 산골짜기를 따라 중촌(中村)이 있고 거기서 한참 더 들어가면 승학동(乘鶴洞)이 있는데 지금은 민가(民家)가 없어진 폐동(廢洞)이다.
조선조 순조 때 죽(竹)엄 이국(李)이 이 마을에 터를 잡은 후 각산(覺山) 이방섭(李邦燮), 물연(勿淵) 이장유(李章緌), 만비당(萬非堂) 이종흡(李鐘洽) 등 이 대를 이어 살면서 여주(驪州) 이씨(李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고, 구한말 이후에는 밀양 박씨와 김녕(金寧) 김씨(金氏) 경주 손씨(孫氏)도 이 마을에 살았다.
중마(中村) : 사연 본동에서 승학동으로 가는 중간 위치에 있는 마을이다. 사연과 승학동의 중간 마을이라 하여 생긴 지명인데, 오래전부터 민가(民家)가 있었으며 1921년 경에는 이 곳에서 금동(金銅)으로 된 불상(佛像)을 발견하여 당국(當局)에 신고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승학동(乘鶴洞, 사앙동, 시역동) : 중마 북쪽에 있는 폐동(廢洞)인데 사연 본동에서는 약 4km쯤 떨어진 산허리에 위치한다. 옛날에 신선이 학을 타고 날아온 곳이라 하여 승학동이라 했으나 후일에 음이 변하여 시앙동 또는 시역동이라 불렸다. 조선조 헌종(憲宗) 때 농은(農隱) 이종곤(李鍾崑)이 입촌(入村)하여 살았으며 그 후 경주(慶州) 손씨(孫氏)도 거주한 일이 있으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
침류정(枕流亭, 鏡湖, 범머리못) : 사연 본동에서 용회동으로 돌아나가는 길 아래쪽에 있는 의령(宜寧) 남씨(南 氏)의 정자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무덤이 있는 판서(判書) 남오와 침류정(枕 流亭) 남우문(南右文) 부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거주지인 사촌(沙村)에 있던 것을 1953년에 자손들이 이 곳으로 옮긴 것이다. 본래 이 곳은 태동(台洞)에 거주한 군수 안장원(安璋遠)이 1900년경에 세운 경호정(鏡湖亭)이란 별장(別 莊) 자리인데 남씨(南氏) 문중에서 그 정자를 사들이고 침류정(枕流亭)이란 현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연못이 있었는데 범머리산 밑에 있다 하여 범머리못(虎頂淵)이라 하였고, 안장원(安璋遠)이 정자를 지으면서 거울과 같이 맑은 호수라 하여 경호(鏡湖)라 했다.
곰소(熊淵, 곰소, 熊沼) : 사연 본동에서 하천을 따라 북상하면 당모랭이 아래쪽에 위치한 깊은 연못 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푸른 물이 감돌고 있어 옛날부터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물길이 뒤쪽 정각산 너머에 있는 산내면 시례 호박소(臼淵)와 통해 있어 그 이무기가 왔다 갔다 한다는 전설이 있고, 호박소에서 기우제를 재낼 때 희생(犧牲)으로서 소머리를 바치게 되면 그 살점과 소코의 나무가락 지가 곰소 물위에 뜬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구연(臼淵)과 웅연(熊淵)에서는 동시에 기우제를 지내는 일이 많았다 한다. 또 곰소라는 지명은 그 지형이 곰이 물을 마시고 있는 형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동화마을
사연 본동에서 동쪽으로 단장천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행정적으로 모두 다섯 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충사로 가는 도로변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 동화전(桐花田) 본땀이고, 거기서 남쪽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세천(洗川)과 성지곡(聖智谷)이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밭말리(田旨)와 말뱅이 (말방)가 위치해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동화전(桐花田)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 일대에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나무꽃 밭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또 동하진이라는 다른 지명도 있는 바 이 하진(下津)이라는 다른 지명도 있는 바 이곳은 옛날 영정사(靈井寺)(표충사,表忠寺)로 가는 길목으로 사연에서 건너오는 나루터였다고 한다. 곧 사연의 동쪽 아랫마을 나룻터라 하여 동하진(東下津)이 동화전으로 변음이 된 곳으로 전해 온다. 조선조 선조때 손영이 경주에서 입촌한 후에 월성 (月城) 손씨(孫氏)의 터전이 되었는데 철종때는 그 후손인 대평항재 손호익이 살았던 마을이다. 1910년에 손씨(孫氏) 문중에서 사양재(泗陽齋)라는 재사(齋舍)를 건립하여 수호하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세천(洗川), 성지골(聖智谷, 聖地谷), 말뱅이(말坊, 末方), 밭말리(田旨, 栗 末里)
지명유래
세천(洗川) : 동화전(桐花田)과 성지곡(聖智谷)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흘러 깨끗이 씻어 내린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 아온 곳이다.
성지골(聖智谷, 聖地谷) : 동화전에서 세천을 지나 북쪽 산골짜기로 한참 들어간 곳에 있는 옛날 화전민(火田民) 마을이다. 성지라는 감여가(堪輿家)가 살았다 하여 성지골이라고도 하고, 명당이 있는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성곡(聖谷) 또는 성지곡(聖地谷)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조 후기에 피난민이 정착하여 화전(火田)을 일구고 산 이후 점차 취락(聚落)이 형성된 곳이다. 동화전 윗마을이라 하여 상촌(上村) 곧 상추마라고도 했다.
말뱅이(말坊, 末方) : 동화전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말방이란 말(馬)을 먹이는 방리(坊里)라는 뜻인데 옛날 이 곳에서 말을 길렀다는 전설이 있다. 또 옛날 태용리(台龍里) 끝마을이라 하여 말방(末方) 또는 말방(末坊)이라 했다고도 한다.
밭말리(田旨, 栗末里) : 밭이 있는 마을이란 뜻인데 말방의 서쪽에 있다. 또 말방에서 시작된 밤숲이 끝나는 지점이라 하여 밤말리라고도 한다. 태룡리와의 경계 지점이다.
범도마을
동리(洞里)의 중심 마을으로 메물산(木麥山)을 등에 지고 고사천(姑射川) 동편(東便) 강가에 자리잡은 고촌(古村)이다. 마을 앞에 호수처럼 생긴 깊은 소(沼)가 있어 범도연(泛棹淵) 또는 도연(棹淵)이라 했으며 동리(洞里)의 지형(地形)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라 한다. 또 범돈, 범든이라 하는 것은 범도연(泛棹淵)의 발음이 줄고 바뀌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조선조후기에 국난에 이바지한 공로로 나라에서 표창을 받은 서운룡(徐雲 龍)이 이곳에 터를 잡은 후 대대(代代)로 달성(達城) 서씨(徐氏)가 살았고, 같은 시기에 효행으로 이름을 얻은 오정몽(吳禎蒙)이 입촌(入村)함으로서 해주(海州) 오씨(吳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기도 했는데 철종 때는 도사 (都事) 오필선(吳必善)의 효자 정여(旌閭)가 내리기도 했다. 또 인근 죽림 (竹林) 안희원(安禧遠)이 그 아버지 치와(恥窩) 안효완(安孝完)을 위하여 세운 도연정(櫂淵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다만 그 유허(遺墟)에 이선대(移船臺)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마을 남쪽 고례리와의 경계 지점인 박산(博山) 산 중허리에는 옛날 심진암(尋眞庵)이라는 절터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 1916년에 부북면 퇴로리(退老里)에 거주하는 여주(驪州) 이씨문중(李氏門中)에서 그 선조인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의 소요처라 하여 도원정(桃源亭)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구시방골못(凹谷池)
지명유래
구시방골못(凹谷池) : 범도연 건너편 구시방골 뒷산 중턱 골짜기 안에 있었다. 옛날부터 이곳이 명당 자리라는 소문이 있어 어떤 사람이 묘(墓)를 서고 나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가 된 이후에는 찾아오는 식객(食客)과 과객(過客) 들 때문에 그 가모(家母)가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술(道術)이 있다는 중 한 사람이 찾아들어 시주(施主)를 청하였다. 그 가모(家母)가 은밀히 중을 만나서 듬뿍 시주를 하고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한 끝에 과객(過客)과 식객(食客)이 찾아오지 않도록 하는 비방(秘方)을 물었다. 중은 대답하기를 "비방(秘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후회를 하실 터인데요."하고 난색을 표했다. 이에 가모(家母)는 나중에라도 후회와 원망은 하지 않을 터이니 비방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다. 그 중은 입맛을 다시며 마지못해 하는 듯 하면서" 범도연 건너편 구시방골에 있는 선산 앞에 못을 파시오. 그러면 과객 식객의 발이 뚝 끊어질 것입니다." 하고는 떠나 버렸다. 가모는 바깥주인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몰래 종복들을 동원하여 구시방골 선산 앞에다 못을 파 내려갔다. 얼마쯤 못을 파내려 가는데 별안 간 땅이 터지는 것 같은 폭음과 함께 땅속에서 김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그 자리에 못을 완성시키기는 하였으나, 웬일인지 갑자기 가세(家勢)가 기울어 얼마 가지 않아서 집이 망해버렸다. 부자의 인색함과 가모(家母)의 분별 없음이 복(福)을 차버리고 화(禍)를 자초(自招)한 것이다. 지금은 못이 없어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아불마을
범도연 북쪽 메몰산 아래에 있으며 표충사행 국도변에 위치한 큰 마을이다. 원래는 작은 주막(酒幕)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1922년에 이곳에다 사립표충학원(私立表忠學院)을 설치한데 이어 곧 태룡초등학교 산동분교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마을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후 학교는 다시 산동초등학교로 승격되고 표충사의 어귀로서 버스정류소 등 생활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지금은 산중 도방의 구실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아화(阿火)라 했다. 옛날에 어느 노승(老僧)이 지나 가다가 큰불이 나겠다고 예언한 일이 있었는데, 과연 2년 만에 마을에 큰 화재가 났으므로 지명이 불길하다 하여 부처님의 가호(加護)를 빈다는 뜻 에서 아불(阿佛)이라 표기한다고 한다. 이 마을의 서쪽 냇가에 있는 새마 와 골마(谷村)와 표충사행 국도변에 위치한 석밭탱이도 행정상 아불에 소속된 땀이다.
유물, 유적
반계정 : 문화재자료 제 216호로 영조때 산림처사로 이름이 높았던 반계 이숙의 별업으로 1775년에 창건했는데, 밀양강의 맑은 물이 감도는 강언덕 반석위에 건물을 세운 것이 특징인데, 당시 고을 명류들과 어울려 청담하고 시를 읊던 곳이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골마(谷村), 새마(新村), 정각산 절터(正覺山, 鼎角山)
지명유래
골마(谷村) : 아불 본동의 서쪽에 있는 강가의 작은 마을이다. 정각산 아래에 위치하여 골짜기 안에 있다 하여 골마(谷村)라는 지명을 얻었다. 옛날부터 정각산의 닥나무로 한지(韓紙)를 만들어 온 마을인데 범든종이의 본포가 이곳에 있었다. 구한말(舊韓末)에 사인(士人) 이병관(李炳觀)이 이 마을에 입촌하여 도연 정사(道淵精舍)를 세우고 은거(隱居)한 일이 있다.
새마(新村) : 석바탱이에서 아불 마을로 가는 국도변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新村)라 하였다.
정각산 절터(正覺山, 鼎角山) : 사연 본동 동북쪽 반계정 뒷산 중허리에 절터가 있고 종 모양의 돌 부도(浮 屠)가 있다.1900년 경에 이 곳에서 돌부처가 나왔다고 하며 절은 없어졌다. 정각산에 있는 절이었다 하여 정각사라 했는데 절은 없어졌다. 정각산(正覺 山)은 일명 정각산(鼎角山)이라고도 하며 산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쇠뿔(牛角)과 같이 생겼다 하여 솥뿔(鼎角)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평리마을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서북쪽의 이웃 동리(洞里)인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고사천(姑射川) 계곡을 거슬러 남하하면 평리(平里), 고례(古禮), 사희동(四熙洞), 덕달(德達) 등 자연 마을이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차례대로 전개되고, 동북쪽에는 또 다른 승경(勝景) 속에 풍류동(風流洞)이란 산상(山上) 별구(別區)가 숨어 있는 곳이다. 동남쪽에는 향로봉(向路峰)의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진 가운데, 서쪽에는 뇌암산(雷岩山)을 사이에 두고 국전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으로 높다란 산봉우리 너머에 구천리, 범도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동리(洞里)의 서북쪽 범도리(泛棹里)에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을 끼고 있으며 비교적 들판이 넓은 이 지대는 지금은 2001년 11월 완공된 밀양댐으로 수몰된 고례천(古禮川) 상류부근인 농암대(籠岩臺)서 흘러내리는 급류로 많은 토사(土沙)가 쌓여서 이루어진 비옥한 평지지대(平地地帶)이다.
평리(平里)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는 것은 평평한 들판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통 안에서는 전답(田沓)이 제대로 갖추어진 행정 부락의 하나이다. 이 부락 건너 하천(河川)가에 모래동(사동(沙洞))이라는 땅이 있고 동편으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풍류동(風流洞)이라는 아름다운 땅이 자리 잡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평리(平里, 坪里, 평지마), 풍류동(風流洞)
지명유래
평리(平里, 坪里) : 동리(洞里)의 서북쪽 범도리(泛棹里)에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을 끼고 있으며 비교적 들판이 넓은 이 지대는 농암대(籠岩 臺)서 흘러내리는 급류로 많은 토사(土沙)가 쌓여서 이루어진 비옥한 평지 지대(平地地帶)이다. 평리(平里)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는 것은 평평한 들 판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통 안에서는 전답(田畓)이 제대로 갖추어진 행정 마을의 하나이다. 이 마을 건너 하천(河川) 가에 모래동(사동(沙洞))이라는 땀이 있고 동편으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풍류동(風流洞)이라는 아름다 운 땀이 자리 잡고 있다. 또 구천(九川) 삼거리쪽으로 길이 나 있는 산상 (山上)의 별구(別區)인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번데기마도 행정적으로는 평리(平里)에 소속된 취락이다. 조선조 정조때에 월간(月磵) 구(具)경이 이 마을에 시거(始居)한 후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 며, 1975년에 추모재(追慕齋)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풍류동(風流洞) : 평리 마을에서 바드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바드리 아랫마 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여러 가지 지명(地名)이 있는데, 마을 앞에는 풍수지리의 옥녀혈(玉女穴)이 있다 하고, 동서쪽으로는 둥둥재 라는 고개가 있으며, 아래쪽 물 가운데 북바위(鼓岩)가 서 있고, 그 위쪽에는 퉁소바위(簫岩)가 있다. 또 이 바위 위쪽에 있는 산을 칭칭이산이라 하니 모 두가 풍류와 관계되는 지명이다. 곧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칭칭나네를 부르고 춤을 추는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풍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례마을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서북쪽의 이웃 동리(洞里)인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고사천(姑射川) 계곡을 거슬러 남하하면 평리(平里), 고례(古禮), 사희동(四熙洞), 덕달(德達) 등 자연 마을이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차례대로 전개되고, 동북쪽에는 또 다른 승경(勝景) 속에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풍류동(風流洞)이란 산상(山上) 별구(別區)가 숨어 있는 곳이다. 동남쪽에는 향로봉(向路峰)의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진 가운데 양산군 하서면과 군계(郡界)를 이루었고, 서쪽에는 뇌암산(雷岩山)을 사이에 두고 국전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으로 높다란 산봉우리 너머에 구천리, 범도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밀양댐이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계류(溪流)와 전답(田畓)이 아름다우며 기암절벽 이 마치 옥(玉)기둥을 세워 놓은 듯 깨끗한 인세(人世)의 진경(眞境)이라 한 기록이 있거니와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 맑은 계류(溪流) 가에 있는 농암대(籠岩臺)는 그 대표적인 명승지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 곳을 찾아 유상(遊賞)했으며 승경 (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기고 있으니 마을의 여러 지명도 선생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례리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당초의 지명은 고예(庫藝)라고 했다. 또 동리 (洞里)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에 있는 범도행주(泛棹行舟)를 마고 할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고예(姑曳)라고도 했으며, 그 뒤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으 로 아름답게 바꾸기도 했다. 점필재 선생이 이 곳을 유력한 이후에는 언제 부터인지 이 마을이 고례리로 표기되었다 하며, 통안의 다른 자연 마을들 도 도덕(道德)이 통달한 덕달(德達) 마을,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놀던 곳이라는 사호리(四皓里) 등 뜻 깊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1914년 행 정구역 개편시에 구천리(九川里) 일부와 양산군 원동면의 중선리(中善里) 일부를 병합하여 고례리(古禮里)의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였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유물, 유적
사호정 : 단장면 고례리 사호동에 있다. 조선조 중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 감찰을 지낸 학자 채지당 박귀원(1442~1530)이 이곳에 별업을 지어 은거한 곳이다. 채지당 사후에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폐허만 남아 있던 것을 1606년에 현손인 락춘 박이화와 양제 박이문 형제가 이곳에 다시 재견하였다. 그후에도 몇 번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1958년에 16세손인 박기학이 모든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금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사호정이란 이름은 점필재 김종직이 그 제자인 김한원당, 정일두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여 중국 상신의 고취를 모방하여 지어준 것이라 전해온다.
고예(古禮, 姑射, 姑曳, 庫藝) : 평리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통 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심 되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 계류(溪流)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양지마(陽地), 남쪽에 음지마(陰地), 물 건너에 구석마(龜石村)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예 (庫藝)와 고예(姑曳) 또는 고사(姑射) 등의 옛 이름은 이 마을을 두고 일러 온 것이며, 지금도 고례초등학교와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 생활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양지마에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사(處士) 장내 강(張乃絳)이 피난지로 정한 곳이며 그 이후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마을 이 되었다. 후손들이 1957년에 옥봉(玉峰) 아래에다 옥봉정(玉峰亭)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음지마도 인동(仁同) 장씨 일파의 마을로 순조(純祖) 때 진사 장창익(張昌翼)이 살았으며, 그 아들 장응구(張膺九)는 효자로서 나라의 명정(命旌)이 있었는데 1898년(광무 2)에 동구(洞口) 밖에다 삼성각(三省閣) 이라는 효자각(孝子閣)을 세워 기리고 있다. 구석마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하여 구석촌(龜石村)이라 하는데 역시 인동(仁同) 장씨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낙주(洛洲) 장선흥(張善興)이 시천(始遷)한 곳으 로 1918년에 장씨 문중에서 입촌한 선조와 그 후손인 농산(聾山) 장영석(張 永錫)을 추모하기 위하여 낙주정(洛洲亭)이란 제사를 세웠다.
구곡천(九曲川) : 사희동(四熙洞)에서 사연리(泗淵里)까지 흐르는 계류(溪流)의 지명이다. 아홉 굽이를 돌아 흐른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고사구곡가(姑射九曲歌)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구곡(九曲)은 사연(泗淵), 정각산(正覺山), 범도리(泛棹里), 승학동(乘鶴洞), 단애(丹崖), 증소(甑沼), 도장연(道藏淵), 농암대(籠岩臺), 선소(船沼)를 가리킨다.
덕달(德達,떡달이) : 고례 마을의 남쪽 골짜기 안에 있으며,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에 위치한 자연 마을이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선생과 같이 도덕과 문장에 통달한 명현(名賢)들이 유상(遊賞)한 곳이라 하여 덕달(德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고 한다. 떡달이는 덕달의 된소리 발음으로 별다른 뜻이 없는 지명이다. 행정상으로는 덕달 본동 이외에 죽촌(竹村) 마을과 농암대(籠岩臺) 어구에 있는 사희동(四熙洞)이 이 마을에 소속되어 있다. 덕달마에는 조선조 숙종때 덕산(德山) 이경범(李敬範)이 입촌(入村)하여 경주 이씨 일파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60년에 그 후손(後孫)들이 덕산재(德山齋)를 세워 보존하 고 있다. 사희동(四熙洞)은 조선조(朝鮮朝) 성종(成宗) 때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구거(舊居)로 본래 이 곳에는 별업(別業)이 있었는데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세 명현(名賢)이 방문하여 소요(逍遙)한 곳이라 한다. 점필재 선생이 옛날 중국 상산(商山)의 고취(高趣)를 모방(模倣)하여 별업(別業)의 편액(扁額)을 사호정(四皓亭)이라 했다고 한다. 사호동(四皓洞)은 사호정(四皓亭)에서 파생(派生)한 이름이 며, 그 후 사희동(四熙洞) 또는 사의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사호정(四皓亭) 건물(建物)은 1606년(宣祖 39)에 채지당(採芝堂)의 현손(玄孫)인 악춘(樂春) 박이화(朴而華)와 양재(讓齋) 박이문(朴而文) 형제 가 중건(重建)한 것을 그 후 몇 번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1958년에 재건(再建)하여 밀성 박씨 문중에서 재사(齋舍)로 삼고 있다. 현재는 밀양댐 준공으로 수몰되었다.
바드리마을
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며, 밀양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 1오치, 2바드리, 3감물리라고 할 만큼 높은 지역이다. 그리하여 고랭지 채소로 이름 난 곳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사과, 배, 석류 등을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평리, 서북쪽으로는 삼거와 인접해 있으며 이 마을 뒷산인 백마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바드리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본래 바드리마을은 평리마을에 속한 자연마을이었으나 기존 본동인 평리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2017년 1월 1일자로 분통되어 하나의 행정마을로 편성되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바드리는 바오달리라는 말로써 옛날에 군사가 진을 친 자리를 말한다. 평리마 뒷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제법 넓은 들이 있는 고지대 부락이다. 옛날부터 일오치(一烏峙), 이소월(二所月), 삼감물(三甘勿)이라 하여 밀양지역에서 세 고지대의 하나로 꼽는 마을이다. 일조(日照)가 좋아 고랭지 채소 재배로 유명한데 특히 바드리 무는 전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마을 뒷산은 백마산(白馬山)으로 아득한 옛날에 산사태가 져서 반달 모양으로 형성된 산(소월산(所月山)이 있다 하여 마을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所月里)로 표기하였다. 마을 근처에는 ‘소월산태두외(所月山泰斗外)’라고 하는 명당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바드리(所月里)
지명유래
바드리(所月里) : 평리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제법 넓은 들이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이 마을 뒷산은 백마산(白馬山)으로 아득한 옛날에 산 사태가 져서 반달 모양으로 형성된 산(소월산(所月山))이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所月里)로 표기하였다.
구천마을
이 동리(洞里)의 지명(地名)을 나타내고 있는 마을인데, 표충사(表忠寺)의 서북쪽 정각산(正覺山) 동편 기슭에 길게 자리 잡고 있다. 북쪽 골짜기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서 정승동(政丞洞), 재말리(嶺村), 도래재(回嶺), 귀내(龜川), 삼박골(山幕谷) 등의 자연 땀이 차례대로 두 갈래 하천(河川)을 따라 산재(散在)해 있다.구천(九川)이란 지명은 흔히 재약산(載藥山) 동서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흘러내리는 아홉개 계천(溪川)이 합쳐지는 마을이라 하였고, 고사구곡(姑射九曲)의 상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주소득원으로 사과,대추, 노지깻잎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이 마을은 원래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귀내(龜川)의 천명(川名)으로 인하여 귀내 또는 구내라 하였고 구천(龜川), 구천(仇川)으로 표기된 것이다. 더구나 삼거(三巨), 시전(枾田)을 포함한 구천리(九川里)라는 법정리(法 定里)가 정해진 후로도 이 마을을 원래의 구천(九川) 곧 원구천(元九川)이라 한 것만 보아도 아홉개의 시내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아랫마(下村) : 원구천 본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 여러 땀 가운데서 제일 큰 마을이라 하여 대촌(大村)이라고도 부른다. 아랫마라는 것은 원구천의 아래쪽에 있다 하여 붙인 것이다.
중마(中村) : 원구천 아랫마 위쪽에 있는데, 잿마로 가는 중간 마을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대촌에 비하여 조금 작은 마을이다.
산막골(山幕谷, 삼박골, 삼막곡) : 원구천 중마에서 잿마로 가는 중간쯤에 있다. 처음에는 화전민(火田民)들이 산막(山幕)을 지어 살다가 차츰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산막곡(山幕谷)이라 한 것이다. 또 산삼(山蔘)을 캐러 다니는 심마니들이 막을 지어 살았다 하여 삼막곡이라도 했다. 삼박골은 삼막골의 변음이다.
잿마(嶺村) : 삼막골 위 산등성이에 있는데, 고개마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잿마가 되었다. 감자가 잘 되고 맛이 있다고 한다.
정승동(政丞洞, 政丞谷) : 원구천(元九川) 아랫마에서 구천(九川)을 따라 3km 쯤 들어간 산골짜기 마을이다. 옛날 신라 시대 때 어느 왕자(王子)가 고질병(痼疾病)을 다스리기 위해 재약산의 약물을 마시고 있을 때 수행(隨行)한 정승(政丞)이 머물며 대기하던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다. 또 조선조 어떤 정승(政丞)이 귀양살이 한 곳으로도 전해 온다. 근대에는 천주교도(天主敎徒)가 박해를 피하여 숨어 산 곳이라 하여 순례(巡禮)하는 천주교(天主敎) 신자도 있다.
도래재동(도래재말리, 回嶺洞) : 원구천(元九川)에서 산내면(山內面) 남명리(南明里)로 넘어가는 고개가 회령(回嶺)이며, 그 중간 산허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원구천과 같이 오래전부 터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폐동(廢洞)이 되었다. 도래재말리라고도 한다.
삼거마을
이 동리 서쪽 들머리에 있으며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과는 시전천(枾田川)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자연 마을이다. 아불(阿佛), 표충사(表忠寺), 원구천(元九川)으로 나누어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삼거리 또는 삼가리라 하였고, 시전천(枾田川)과 구천(九川)의 두 내가 합류하여 범도천(泛棹川)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하여 삼계리(三溪里), 삼기리(三岐里)라고도 한다. 김해 김씨,김형 김씨,나라 정씨,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며 주 소득원으로 대추,버섯, 돼지, 소 벼가 주 소득원이다 .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이 동리 서쪽 들머리에 있으며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과는 시전천(枾 田川)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자연 마을이다. 아불(阿佛), 표충사(表忠寺), 원구천(元九川)으로 나누어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삼거리 또는 삼가리라 하였고, 시전천(枾田川)과 구천(九川)의 두 내가 합류하여 범도천(泛棹川)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하여 삼계리(三溪里), 삼기리(三岐 里)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징검다리가 유명했으며 하천(河川) 양(兩) 가에 는 원구천(元九川)의 도래재(回嶺)와 양산(梁山)의 통도재(通度嶺)를 내왕 하는 행인들을 위한 주막거리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분포도 옛날부터 표충사(表忠寺)의 사찰(寺刹) 전답(田畓)을 경작하는 소작(小作) 농민(農 民)들이 많았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삼막골(蔘幕谷, 삼밭골), 동우샘(童牛泉), 약물샘(藥水川)
지명유래
삼막골(蔘幕谷, 삼밭골) : 삼거리 동남쪽 바드리 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동편 첫번째 골짜기이다. 옛날 이 곳에 인삼(人蔘)을 재배했다 하여 삼밭골 또는 삼막골이라 했다.
동우샘(童牛泉) : 삼거리 마을 뒷산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자연적인 우물이다. 이 마을 초 동(樵童)들의 놀이터이기도 한데 아이들이나 소나 가릴 것 없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 하여 동우천이라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약물샘(藥水川) : 사거리 돌정지 뒤쪽에 있는 절벽 사이에서 스며나오는 물을 일컫는다. 보통 때는 물이 스며 나오지 않지만 돌정지에 치성을 드리면 3년에 한 번쯤 7월 7석을 전후(前後)하여 새어나온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물이 바위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며 절벽 밑에 샘이 있어, 특히 문둥병에 효험이 크 다 하여 유명했다. 이 소문을 들은 원근의 문둥병 환자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샘을 묻어 버렸다. 그 뒤부터 절 벽 바위 틈새에서 물이 새어 나왔다고 한다.
시전마을
밀양시의 동북쪽 변경에 위치한 산악 지대의 고촌(古村)이다. 해발 1000m가 넘는 태산(泰山) 준령(峻嶺)이 연봉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영남(嶺南)알프스' 가운데 대표적 명산인 재약산(載藥山) 아래 표충사(表忠寺)의 사하촌(寺下村)이다. 그러므로 이 동리(洞里)는 표충사(表忠寺)의 전신(前身)인 영정사(靈井寺)와 그 역사를 함께 해 온 곳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사찰(寺刹)의 연혁(沿革)을 기록한 '영정사고사적(靈井寺古事蹟)'이란 문헌에는 창건 당시인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4년(829)에 산아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창건(創建)주(主) 황면선사(黃面禪師)에게 찬송(讚頌)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밀주구지(密州舊誌)의 중동면(中東面) 방리조(坊里條)에도 이 동리(洞里)를 바로 영정사(靈井寺)와 재악(載岳)으로 표시하였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재악(載岳)은 재약산(載藥山)의 줄인 말로 생각되지만 옛날 신라(新羅)의 어느 왕자(王子)가 이 산의 샘물을 마시고 고질병(痼疾病)이 나았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세워 영정사(靈井寺)라 하였고, 약(藥)이 실린 산이라 하여 재약산(載藥山)으로 이름 지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또 산중에 는 부속 암자(庵子)로 상운암(上雲庵), 사자암(獅子庵), 안영암(安影庵), 금 강암(金剛庵), 반야암(般若庵)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이름이 바뀌었거나 없어졌고 탁영당(濯纓堂), 학암광평(鶴岩廣坪), 금강대(金剛臺) 등의 유적들도 지명만 전해올 뿐이다. 동리(洞里)의 동쪽으로는 재약산을 주릉(主 稜)으로 하여, 울주군(蔚州郡) 상북면(上北面)과 양산군(梁山郡) 원동면(院 東面)과의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에는 정각산(正覺山) 줄기를 사이에 두고 산내면(山內面) 임고리(臨皐里)와 면계를 이루었다. 남쪽에는 향로산(香爐 山) 준령과 시전천(枾田川) 흐름 사이로 고례리(古禮里), 범도리(泛棹里)와 이웃해 있고, 북쪽으로는 해발 1189m의 천왕봉(天王峰)을 분수령(分水嶺)으로 산내면(山內面) 남명리(南明里)와 경계를 짓고 있는데 곳곳에 물소리가 요란한 계류(溪流)와 폭포(瀑布), 묘봉(妙峰)과 수해(樹海)가 비경(秘境)을 이루고 있는 남도(南道) 제일의 명승지(名勝地)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동리(洞里)에 형성된 전래(傳來)의 취락(聚落)은 영정사(靈井寺)의 사하 촌(寺下村)에 해당하는 지금의 시전(枾田)과 구천(仇川)또는 구천(龜川)이라 불리어 온 원구천(元九川) 마을, 그리고 삼거리(삼가리(三街里)) 등 세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영정사(靈井寺) 뒷편 사찰림(寺刹林)에는 관죽전(官 竹田)이 있어 화살대를 생산했으며, 재약산에서는 수백 가지 약초(藥草)가 자생(自生)하여 특산물(特産物)로서 유명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종래의 구천리를 중심으로 시전과 삼거리를 아울러서 구천리(九川里)라는 법정리(法定里)를 삼아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소속된 행정상의 단위 마을은 구(九)천(川), 삼거(三巨), 시전(枾田)으로 나누어지며 정승동(政丞洞), 회령(回嶺), 산막(山幕), 구천(龜川), 서왕당, 매 바위, 토굴, 사자평 등 자연 취락(聚落)이 산재(散在)해 있다.
유물, 유적
표충사 : 시전(枾田)의 안 골짜기인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있는 큰절이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왜군을 격멸 하였으며 일본과의 강화사절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명당 송운대사의 충의를 표창하여 나라에서 명명한 절이다.
신라 흥덕왕 4年(829年) 황면선사가 창건하고 진성여왕때 보우국사가 방일선찰(方一禪刹)로 만들었으며, 1839年(헌종 5년 1월 17일) 관음전 옛 자리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무안면 표충사에 있던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眞影)과 위패를 옮겨와 절 이름을 표충사(表忠寺)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고려 때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국사(1206-1289)가 1천여 명의 많은 승려를 거느리고 수도하여 불법(佛法)을 중흥하게 되었다고 하여 국왕으로부터 '동방 제일의 선찰(禪刹)' 이란 치하를 들었을 정도로 큰 절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서산(西山), 사명(四溟), 기허(騎虛) 3대 성사(聖師)의 충령을 표시코자 18대 현종(재위 1660-1674)이 '표충부전, 팔상전, 우화전, 응진전, 의중전, 죽도정사, 서광각 등 고색이 창연한 건물들은 이 절의 역사를 말해준다.
이 절은 국가 지정 국보 제75호인 표충사 청동함은향완(表忠寺 靑銅含銀香琓), 보물제 467호인 3층석탑 그리고 사명대사 유물 200여종과 각종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최근에는 표충사 주지 신허스님 등이 사명대사호국선양회 준비위원회를 만드는 등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현대의 마지막 고승인 효봉스님은 표충사 서래각에서 그가 미리 말한 시간에 앉은 그대로 입적했다. 그의 사리탑은 표충사와 본사인 송광사에 세워졌다. 표충사에 있는 효봉스님 사리탑은 목탁소리가 나기로도 유명하다.
표충사3층 석탑 : 표충사 경내 서편, 대홍원전 앞에 있는 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1995년 해체 보수공사중 나온 유물은 탑 조성, 보수공사 등 이 탑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신 탑으로 기단은 단층이다. 높이 7.7m로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이 이색적이며, 문경에 있는 봉암사 3층 석탑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각부 비례가 균형이 잡히고 전체적으로 우아한 작품이다. 단지 1층 옥신석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 될 것이다.
상륜부에는 아직 찰주(擦柱)가 솟아 있고, 2층 처마 4귀에는 풍령(風鈴)이 매달려 있다. 찰주에 꽂혀진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제의 3층석탑으로서 기단은 단층이며 면석은 5매로 구성되고 탱주일주가 있어 각면은 2구로 구분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일매석으로 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 합각머리에는 풍령공이 있고 2층나무에는 현재도 달려있다. 이 석탑은 기본이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이 이형에 속한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 467호로 지정 되었다.
표충사 석등 (表忠寺石燈) : 이 석등은 8각의 간주< 竿柱 > 위에 상대석< 上臺石 >, 화사석< 火舍石 >, 옥개석< 屋蓋石 >을 갖춘 일반적인 석등으로서 현재 표충사 3층석탑과 함께 있으나, 원래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신라석등< 新羅石燈 >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조각수법이나 규모로 보아 시대가 뒤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석등의 높이는 2.4m이다.
청동합은향완 : 제작 연대는 고려 명종 7년(1177)으로 우리나라 향로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일본의 법륭사에 있는 향로보다 1년 앞서 제작된 것이다.
이 향완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가 사명대사에게 하사한 것으로, 표충사 탐진당 안 철제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
은입사향로는 불전에 향을 사르는 불구로서 고려시대의 제작품이 그 대표가 되고 있다. 이 향로 역시 이른바 은입사 기법에 의하여 제작된 금속공예품으로서 가는 은사를 가지고 청동 향로에 시문한 것이다.
은입사 장식은 우리나라 청동기 공예품으로 고려시대 이래의 불교 예술품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시대의 유품으로 보아 12C에 은입사 기술이 매우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향완은 고려 명종 57년에 만들어 졌다. 향완의 상선부의 변쪽에는 여섯자의 범자문(梵字文)을 상감하고 사이에는 서운문을 장식하고 있다. 화사의 바깥면에는 동심원속에 범자문이 들어있다
형태는 상하 양층으로 이루어진 원형고배형(圓形高杯形)이고 높이는 27.5cm, 구경 26.1cm인 향로이다. 이 향완의 상연부(上緣部)에는 여섯자의 범(梵)자와 구름무늬를 차례로 새겼으며, 화사부(火舍部) 외면에는 4자의 범자를 새겼고 넓다랗게 퍼져나간 굽다리 윗부분에 용과 구름무늬를 은입사(銀入絲)로 상감(象嵌)했는데 이들 문양은 잘 배치되어 격조 높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시전(枾田, 감밭) : 삼거리와 표충사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부터의 대표적인 사하촌(寺下村)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 일대의 임야(林野)는 물론 대부분의 경작지(耕作地)도 표충사의 재산(財産)이었으며 시전(枾田)이란 지명도 사찰용(寺刹 用)의 곶감을 생산하기 위한 표충사 감나무밭에서 유래된 곳이다. 이 곳에서 나는 감으로는 곶감을 만들어 절에서 일용으로 쓰는 한편 적죽(笛竹), 약재(藥材), 한지(韓紙), 채과(采菓)와 함께 관청(官廳)의 공납품(公納品)으로 진상(進上)하는 관례가 오랫동안 있어 왔다.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대개 표충사(表忠寺)와 관계가 있는 승려들의 가족과 사용인, 그리고 상인들이 거주하는 경향이 많았으며 따라서 주민들 가옥의 대지(垈地), 경작지(耕作地), 과일 나무들이 아직도 사찰(寺刹) 소유(所有)로 된 곳이 많다.
시전(枾田)에 소속된 땀은 감밭 이외에 서왕당(西往堂), 매바위(鷹岩), 토굴 (土窟) 등이 있으며, 재약산(載藥山) 동쪽에 있는 사자평(獅子坪) 언저리에도 민가(民家)가 있다.
표충사(表忠寺, 피충절) : 시전(枾田)의 안 골짜기인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있는 큰절이다. 원래 신라 (新羅) 시대의 고찰(古刹)인 영정사(靈井寺)로서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임진 왜란 때 의승(義僧)인 서산(西山), 사명(泗溟), 기허(騎虛) 등 삼대사(三大師)의 표충서원(表忠書院)을 사찰(寺刹) 안에 둠으로서 그 사명(寺名)이 표충사 (表忠寺)가 되었다. 신라 흥덕왕(興德王) 4년(829)에 서역(西域)의 중인 황 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創建)했다고 하며, 신라의 왕자가 이 곳의 약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 하여 처음에 영정사(靈井寺)라 한 것이다. 신라(新羅) 때 보우국사(普佑國師)와 고려(高麗)때 해린국사(海麟國師), 일연선사(一然 禪師), 천희국사(天熙國師)가 이 절에 주석(住錫)하여 크게 이름을 얻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寺刹)을 크게 일으켰다. 조선조후기에는 한때 법당 (法堂)이 여덟 개, 지전(持殿)이 네 개, 선방(禪房)이 열일곱 개, 부속(附屬) 암자(庵子)가 15군데나 될 만큼 전성기를 누리었고, 절 뒤편에 큰 대밭이 있어 옛날부터 죽림사(竹林寺)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다. 현재 사찰(寺刹) 안에는 국보(國寶)가 한 점, 보물(寶物)이 한 점, 민속(民俗) 자료(資料)가 한 점, 도지정문화재(道指定文化財)가 여덟 점이나 되는 문화재(文化財)를 보유하고 있다.
대원암(大願庵, 西往庵) : 표충사(表忠寺) 남쪽 입구 400m 지점에 있는 비구니(比丘尼)암이다. 조선조 전기의 창건(創建)으로 추정(推定)되며 당초의 사명(寺名)은 서왕암(西往庵)이었다. 신중암이라고도 한다.
내원암(內院庵) : 표충사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있는 산비탈에 있다. 법당(法堂)과 요사(寮 舍), 부속(附屬) 건물(建物) 몇 채가 있으며 창건은 조선조 초기이다.
동상암(東上庵, 眞佛庵) : 표충사의 북동쪽 높은 산 절벽 위에 있다 하여 동상암이라 했다. 창건 연대 는 고려(高麗) 시대(時代)이나 지금의 건물을 1844년(헌종 4)에 월파대사(月 坡大師)가 재건(再建)한 것이다. 사암의 편액을 진불암(眞佛庵)이라 했다.
서상암(西上庵) : 표충사에서 서북쪽 산 절벽 위에 있다. 창건은 동상암과 비슷한 시기이나 거승(居僧)이 없을 때가 많았다.
한계암(寒溪庵) : 표충사 북쪽 금강폭포(金剛瀑布) 옆 벼랑 위에 지은 암자(庵子)이다. 1968년에 이 절에 주석(住錫)한 석정화상(石鼎和尙)이 건립(建立)하였다.
매바우(鷹岩) : 시전 마을 동쪽에 있는 땀 이름이다. 마을 뒤쪽 산에 매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도 매바위가 되었다. 또 매바위 근처에 실지로 매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토굴(土窟) : 지금은 표충사 정문 바깥에 위치해 있으나 그 전에는 후문 밖이었다. 토굴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日帝時代)에는 대처승(帶妻僧)들이 나와서 자고 가던 곳이었다고 한다.
층층폭포(層層瀑布, 毘盧瀑布) : 표충사 남쪽 계곡을 따라 사자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폭포이다. 이 일대의 아름다운 수석(水石)을 일컬어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 하는데, 이폭포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경관이다. 사자평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절벽에 층을 지어 떨어진다 하여 층층폭포라 하였고, 그 아래 소(沼)와 골짜기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비로폭포(毘盧瀑布)라는 일명(一名)도 있다.
금강폭포(金剛瀑布) : 표충사 서쪽 계곡을 따라 서상암(西上庵)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폭포이다. 이 일대의 수석(水石)과 동학(洞壑)을 일컬어 금강동천(金剛洞天)이라 하는데, 이 폭포는 그 대표적인 경승(景勝)이라 할 수 있다. 폭포 떨어지는 자리가 깊게 패어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에는 한계암(寒溪庵)이라는 암자(庵子)도 있다.
사자평(獅子坪) : 재약산 동쪽 기슭에 펼쳐진 해발 800m의 지대이다. 오래 전부터 화전민(火田民)이 밭을 일구어 살아오면서 고냉지(高冷地) 채소(菜蔬)와 약재(藥材)를 재배해 왔다. 일제 때는 이 곳에 목장(牧場)이 설치되었고 눈이 많이 내리는 산상(山上)스키장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20여호의 민가(民家)가 살아, 고사리학교(學校)라는 산동 초등학교 분교(分校)가 개설(開設)되었다. 수만평의 평원(平原)의 억새밭이 유명하고, 영남(嶺南) 알프스의 대표적인 코스이다. 옛날 이 곳에 사자암(獅子庵)이라는 암자(庵子)가 있었으므로 지명이 사자평이 되었다.
사기굴(沙器窟) : 표충사 동상암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언저리에 수기(數基)의 도요지(陶窯址)가 산재(散在)해 있다. 이것은 사자평 너머 울주군(蔚州郡) 상북면(上北面) 지경에 있는 사적 제129호 천왕산(天王山) 도지군(陶址群)과 연관이 되는 문화재(文化財)로 주로 이 일대의 사찰용(寺刹用) 기명(器皿)을 굽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자기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