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포리
법정 전사포리가 전포, 동암 행정리로 분리되었으며, 본담, 신당의 자연 마을로 형성된 농촌으로 본담 마을은 광주 안씨, 신당마을은 성주 도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포도를 특산품으로 집단재배하여 주 소득원으로 생산하고 있음. 마을 앞으로 지방도 1017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사포 초등학교가 소재함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비석껄 : 전사포리 洞口 路邊에 있는 비석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조선조 末期에 貧寒한 洞民을 도와준 廣州安氏一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동민의 뜻으로 세워진 安氏義壓碑이다. 즉 병들어 신고하는 사람, 또는 가난해서 혼인 못하는 사람, 喪을 당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등을 救恤한 事例들이다.
버스시간표
매시간 마다 내일동 사무소앞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前沙浦里의 본땀인데 聚落形成의 始原은 분명치 않으나 조선조 初葉에 安氏一族이 奠居한 뒤로부터 洞勢가 繁盛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찾아오시는 길
내일동사무소 앞에서 매시간 마다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됨.
특산물
포도 , 배(황금,원앙,신고)
- 재배여건 : 하우스,노지
- 출하시기 : 7월 ~ 11월
기타
전사포 마을은 주소득 작물이 포도와 배를 생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주민들의 인심이 좋아 인정이 넘쳐 살기좋은 마을이며, 인근에 사포공단이 있어 농업과 공업이 조화를 이루는 곳임.
동암리
府北面의 南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원래 사포마을앞의 저습지로서 세월따라 막히고 쌓여 田畓이되고 자연히 집이 지어지고 마을앞에는 울창한 숲이우거져 있고 지금은 본동,새마,馬岩山과 함께 一洞을 이루고 있음 동쪽 馬岩山의 큰바위가 마을 앞으로 향하여 있다고 해서 동암이라는 洞名이 되었다고 하며 언제부터 생긴 이름인지는 알수 없으며, 이마을에는 남쪽 산 기슭에 요업,모직등 14개의 공장이 집단적으로 들어와 사포공장단지를 이루고 있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 馬岩山은 마을옆에서 강쪽으로 내밀은 산줄기의 끝에 있는 바위가 말(馬)같은 모양이라고 하여 말바위, 즉 馬岩으로 이름했다고 전하여 옴.
- 밀양팔경중 제7경인 사포낙안으로 사포에 내려않은 기러기떼의 경쾌한 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 하여 팔경에 속해 있다.
버스시간표
매시간 마다 내일동 사무소앞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馬岩山 : 말(馬)의 형상을 닮았다하여 지명이 유래되어 현재까지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음.
찾아오시는 길
내일동사무소 앞에서 매시간 마다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됨.
특산물
포도 , 배(황금,원앙,신고)
- 재배여건 : 하우스,노지
- 출하시기 : 7월 ~ 11월
기타
동암마을은 주소득 작물이 포도와 배를 생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주민들의 인심이 좋아 인정이 넘쳐 살기좋은 마을이며, 인근에 사포공단이 있어 농업과 공업이 조화를 이루고 마을내 정자나무가 있는 체육공원이 있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과 주민들의 휴식 및 체력증진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음.
후사포리
후사포는 부북면의 남.서쪽에 있으며, 현포, 내곡, 중포 의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고려조에 밀양 박씨가 입주 하였고 그로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 지고 있으며, 현재도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며, 지방지정유형문화재 79호인 예림서원과 문화재자료 195호인 박양춘 여표비각이 소재하며, 타지역 보다 당도가 높은 포도가 주생산 농산물임.
마을소개
유물, 유적
- 도지정 문화재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9호
-
예림서원 :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79번지에 소재하는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9호로서
조선시대(1567년)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인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嶺南)
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선생(文忠公 畢齋 金宗直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증 도승지 오졸개
박한주 선생(贈 都承旨 오拙齋 朴漢注先生)을 동쪽에, 처사 송계 신계성 선생(處士 松溪 申季誠
先生)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儒林)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본래는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 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덕성동(德城洞)
(지금의 밀양시 용활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인조 13년(1635년)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禮林里)로 옮겼다가 숙종 6년(1680년) 묘우(廟宇)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後沙浦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제 철거된 바 있으나 고종 11년(1874년)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 5칸과 동서제
(東西薺)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光復)후에 사액(賜額)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건물은 육덕사(育德祠), 정양문(正養門), 강당, 동제, 서제, 양몽제(養蒙薺), 독서루(讀西樓)등이 있다.
- 점필재문집책판(畢齋文集冊版) 및 이존록(彛尊錄)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5호
- 점필재문집판 : 영남사림학파(嶺南士林學派)의 개조(開祖)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시문을 모은 문집책판이다. 이문집은 성종 24년 (1493년)에 그의 생질이며, 제자인
강중진(康仲珍 : 홍문관 수찬 康伯珍의 동생)이 선생의 초고를 모으고 저자(著者)의 문도(門徒)인
송계(松溪 조위(曺偉 : 점필재의 처남)에게 편집을 부탁하여 만든 원고가 성종(成宗)이 보신후 미처
간행하지 못한 터에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강중진(康仲珍)이 다시
나머지 글을 모아서 중종 12년(1520년)에 선산(善山)에서 당시 군수의 협조로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것이 초간본(初刊本)이다. 그 뒤 여러차례의 수정, 보완, 교정, 보각(補角)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시집(詩集)23권, 문집(文集) 2권, 도합 25권이며 년보(年譜), 무오사적(戊午事蹟), 문인록(文人錄)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고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보존되고 있다.
- 이존록책판 : 이 책판은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江湖) 김숙자(金淑滋 : 1389-1456)의 가계(家系), 사적(事蹟)
언행(言行)등에 관한 기록으로, 한 사대부(士大夫) 가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사료(史料)인데, 점필재가 직접 저술(著述)하고 송계(松溪) 조위(曺偉)가 서문(序文)을
강백진(康伯珍)이 발문(跋文)을 ?다. 김종직의 외조부 박홍신(朴弘信)과 첫째부인 박(朴)씨의 행장을
덧붙인 책으로 상.하 양권(兩券) 1책 71장(張)으로 되어 있는데 연산군 3년(1497년)에 발간한 것은
임란(壬亂)때 불타없어지고 이후 1709년에 중간(重刊), 1892년에 삼중간(三重刊)하여 예림서원
(禮林書院)에 보관 중이다.
- 박양춘여표비각(朴陽春閭表碑閣)
- 경상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195호인 이 비각은 모헌(慕軒) 박양춘(朴陽春 1561~1631)의
출천지효(出天之孝)를 기념하여 1912년에 향중 사람들이 모헌의 유허(遺墟)에
이 여표비(閭표비)를 건립하고 비각(碑閣)을 세웠다. 모헌은 명종 때 효행으로 호조참의
(戶曹參議)에 특별히 재수된 성재(惺齋) 박항(朴恒)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밤에는 시묘(侍墓)하고 낮에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일과를 거르지 않았는데,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광탄(廣灘)이 세어 건너지 못하고 울부
짖고 있을 때 갑자기 강물의 흐름이 중단되는 이변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중에 조모와
어머니의 상(喪)을 함께 당하였으나 병화(兵禍)를 피하지 않고 밤 낮으로 호곡(號哭)을
하므로 모헌의 효의(孝義)에 감복한 왜장이 그집을 표시하여 외병의 침입을 막아준
일화도 있다. 그 왜장이 지극한 효성을 기리어 출천지효(出天之孝)라는 문자를 써서
정표(旌表)한 것이 이 여표비(閭表碑)의 시초이다.
비석의 제액(題額)은 모헌박선생여표유허비명병서(慕軒朴先生閭表遺墟碑銘幷序)라
하였고, 비문은 탁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지었으며, 진사(進士) 안종석이 글씨를 썼다.
버스시간표
매시간 마다 내일동 사무소앞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현 포 : 옛날 현인, 선인들이 살 던 곳이란 뜻에서 현포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 중 포 : 중포는 전사포와 후사포 중간에 있는 까닭에 중포라고 한다.
- 내 곡 : 내곡은 현포와 제대리 송악 사이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안골(內谷)이라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마암산 터널에서 자가용으로 2~3분 정도 걸리며, 제대사거리에서도 2~3분 정도 거리에 있다 .
특산물
포도, 배(황금, 원앙, 신고)
- 재배여건 : 하우스,노지
- 출하시기 : 7월 ~ 11월
제대리
제대리는 밀양의 鎭山인 화악산에서 종남산까지 높고 긴 능선이 이어지면서 고암산, 연령산등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두 산맥이 접하고 있는 지점에 동남향으로 마을과 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제대리는 제대마을, 한골마을, 송악마을등 삼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명 못골이라고도 하며 가구수는 15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高麗時代에 朴氏, 朝鮮時代에 金氏, 蔣氏, 閔氏 등이 奠居하기 시작하고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일명 못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進士 蔣건등이 興防堤라는 큰 堤防을 築造하여 灌慨 및 일상생활의 용수로써 주민을 크게 도와 주었는데 그로 인해 못골, 또는 堤大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하며 일찍부터 마을의 규약을 제정하여 풍습을 바로 잡기도 한 마을이었다.
버스시간표
제대로 가는 버스는 따로 없으며 제대 마을은 창녕 또는 사포방향의 길목으로써 사포방향의 마을버스 또는 창녕방향의 시외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마을버스 및 창녕가는 버스는 각 1시간 마다 있다.
지명유래
- 堤 大 理 : 옛날 進士 蔣건등이 興防堤라는 큰 堤防을 築造하여 灌慨 및 일상생활의 용수로써 동민을 크게 도와 주었는데 그로 인해 못골, 또는 堤大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찾아오시는 길
내일동사무소앞에서 사포가는 마을버스를 타면 5분정도 소요되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무안, 창녕방향의 버스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기타
제대마을중 특히 한골마을에는 儒崇 삼畢齋 金宗直 선생의 출생지이며 神道碑 그리고 先生의 夫子분의 묘소를 볼수 있다.
江湖 金叔滋 先生은 丈人 朴弘信의 도움으로 처가인 이곳 한골에 奠居하게 되었다. 세종 13년인 1413년에 江湖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6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3세에 進士試에 합격하고 29세 文科에 及第하였으며 42세에는 영남학파의 巨儒들이 선생의 門下에 모여들었다. 59세에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문집과 국고문헌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6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死後 戊午. 甲子등 두 번의 사화로 士類 들이 많이 犧牲되었지만 거의 復爵 또는 追贈되어 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崇慕하여 禮林書院을 비롯한 6개 書院의 祠宇에 奉享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 한골 입구에 있는 神道碑는 1494년에 曺梅溪가 大提學 洪貴達 에게 청하여 碑銘을 새겨 마을 앞에다 세웠는데 燕山君 戊午士禍에 折破되어 없어졌던 것을 그후 中宗朝 丁卯年에 舊碑文대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壬辰倭亂중에 破損되엇던 것을 1635년에 다시 垓字改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追遠齊는 江湖의 奠居地로 선생의 生家를 紀念하기 위한 건물이다.
신흥리
남으로 종남산, 북으로 화악산, 동으로 감천(감내)를 경계로 밀양시가지, 서로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탄생지인 제대리를 경계로한 부북면의 남중부에 위치하고 삼면이 평야지로 전형적인 도시근교 농촌마을로서 세대수는 100여세대 정도가 거주하고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축산과 함께 감내 들에 딸기를 주로 생산하고 있음 .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부북천이 적항,신평들을 지나 남천강으로 향하는 하류를 감천이라 하고 이 감천의 천변에 위치한 마을을 감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감천리 라고 하고 이웃마을 제대 리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탄생할 당시에 사흘 동안 이 냇물이 감미로왔다고 하여 감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말로 감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애칭되고 있다.
민속놀이, 전설, 민요
감내게줄당기기
- 유래
- 이 놀이는 밀양 감내(甘川)에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민속 상원놀이의 하나로서 그 유래는 원래 감내에 “게”(경상도 말로 일명 끼)가 많아 웃감내(상감)와 아랫감내(신흥)가 서로 “게”잡이를 하는데 좋은 자리(터)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 놀이이다.
옛날에 이곳 감내에서 게가 적게 잡힐때는 웃감내 아랫감내 사이가 좋았으나 게가 많이 잡힐때부터 서로 욕심을 부려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에서 인심이 나빠지게 되어, 이것을 막기위해 마을 어른들이 「게」모양의 줄을 만들어서 줄을 당겨 이긴쪽이 좋은 자리를 차지 하도록 한 것에서 유래가 되어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으나 지금은 마을에서 이 놀이가 행하여 지지는 않고 도지정문화재 제7호 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음.
- 놀이의 특성
- 내용 : 앞놀이에서는 게줄당기기 준비를 하고 이어 게줄당기기를 해서 승부를 겨루며 뒷놀이로 이어져 화합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름
- 놀이의 순서 : 입장 - 당산제 - 터밟기 - 젖줄(작은줄)다리기 - 농발이놀이 - 터빼앗기 - 춤판 - 게줄당기기 - 판굿
- 놀이의 구성
- 당산굿 : 게줄을 당길때는 게잡이를 하는 이권도 있었으나 그 시기가 정월보름과 7월백중때가 되므로 자연히 농가에서는 1년동안 마을의 안녕과 농사가 잘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온갖 치성을 다 드리게 되는데 이곳 감천에서는 서방의 당산이 있어 색다른 고사를 지낸다.
- 농발이놀이 : 당산굿으로 마을의 안녕과 필승을 비는 치성을 드리고 판굿 으로 한바탕 놀면서 “神”을 울린 다음 농발이놀이로 장사 줄다리기 역군울 뽑는다. 이때 首農夫를 손가마에 태우고 나무구 시(소죽통)와 지게목발 장단에 흥겨운 춤과 노래(밀양아리랑)로 사기를 북돋운다.
- 터빼앗기 : 춤판이 끝나면 이어 터빼앗기를 하는 발(竹簾)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싸움은 수농부끼리 작은 줄을 당기기도 하고 “미지개”를 할 때도 있다. 이 터빼앗기 싸움에서 이긴편은 줄다리기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발싸움이 끝나면 젖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젖줄다리기가 끝나면 각기 농악을 선두로 장내를 뛰놀다가 게줄쪽으로 가서 원줄(게의 몸둥이 부분)에 걸어 맨다.
- 게줄당기기 : 줄도감이 울리는 징소리에 따라 시작되는데 줄은 양쪽 각각25명이 작은줄을 메고 하나둘 해서 백까지 헤아릴 동안(약3분) 다리는데 중앙에서 많이 끌고간 편이 이긴다.
- 판굿 : 이 놀이는 게줄당기기에서 진편은 앉고 이긴편은 쾌재를 부르면서 장내를 돌다가 진편을 일으켜서 화동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지명유래
- 장승배기 : 감천리 당산의 하나로서 마을 사방에 당산이 있는데, 동북쪽에 뒤왕산, 서남쪽에 짐대거리, 서북쪽에 박씨할매, 그리고 동남쪽에 있는 것이 장승배기이다. 아마도 옛날에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뒤왕산,짐대거리,박씨할매 모두 특이한 이름이나 그 어원은 알수 없으며 동남 당산과 서북의 박씨할매 당집은 그대로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날 당산제와 함께 박씨할매 당집에서도 제를 올리고 있음.
- 박씨할매 당집유래 :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년전 자식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던 박씨할매가 "내가 죽거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전답을 마을의 소유로 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후 세월이 흐름과 동시 그 재산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으며 지금까지 매년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음.
- 龍尺 마을 : 조선 초기 박거명이 존거 하였다고 하나 마을의 기원은 알 수 없다. 용척을 龍啼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한 전설이 있다. 옛날 송정마을 우물 근처에 한 뛰어난 장사가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가 우물을 수축하기 위해 우물 속에 들어간 뒤에 위에서 흙과 돌을 내리덮어 생매장시켰다. 그랬더니 龍馬 한 마리가 나타나 슬프게 울면서 용척 뒷산으로 해서 上天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용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정기 노선버스는 없으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정도 거리
특산물
딸기
- 재배여건 : 비닐하우스
- 출하시기 : 12월 - 5월
상감리
남으로 종남산, 북으로 화악산, 동으로 감천(감내)를 경계로 밀양시가지, 서로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탄생지인 제대리를 경계로 한 부북면의 남중부에 위치하고 삼면이 평야지로 전형적인 도시근교 농촌마을로 자연마을 본담과 중감내 용척(용재)를 합쳐 상감이라 하며 120여세대 정도가 거주하고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축산과 함께 감내 들에 딸기를 주로 생산하고 있음.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화악산에서 흘러내리는 부북천이 적항,신평 들을 지나 남천강으로 향하는 하류를 감천이라 하고 이 감천의 천변에 위치한 마을을 감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감천리 라고 하며 이웃마을 제대리에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탄생할 당시에 사흘 동안 이 냇물이 감미로왔다고 하여 감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말로 감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애칭되고 있으며 지금은 그 옛날 달다했던 감내물은 간데없고 이름만 남았으며 지금은 본담과 용재를 합쳐 상감(웃감내), 신흥과 농막을 합쳐 신흥(아랫감내)으로 행정리 두개 마을로 갈라져 있음
민속놀이, 전설, 민요
감내게줄당기기
- 유래
- 이 놀이는 밀양 감내(甘川)에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민속 상원놀이의 하나로서 그 유래는 원래 감내에 “게”(경상도 말로 일명 끼)가 많아 웃감내(상감)와 아랫감내(신흥)가 서로 “게”잡이를 하는데 좋은 자리(터)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 놀이이다.
옛날에 이곳 감내에서 게가 적게 잡힐때는 웃감내 아랫감내 사이가 좋았으나 게가 많이 잡힐때부터 서로 욕심을 부려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에서 인심이 나빠지게 되어 이것을 막기위해 마을 어른들이 「게」모양의 줄을 만들어서 줄을 당겨 이긴쪽이 좋은 자리를 차지 하도록 한 것에서 유래가 되어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으나 지금은 마을에서 이 놀이가 행하여 지지는 않고 도지정문화재 제7호 로 지정되어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음.
- 놀이의 특성
- 내용 : 앞놀이에서는 게줄당기기 준비를 하고 이어 게줄당기기를 해서 승부를 겨루며 뒷놀이로 이어져 화합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름
- 놀이의 순서 : 입장 - 당산제 - 터밟기 - 젖줄(작은줄)다리기 - 농발이놀이 - 터빼앗기 - 춤판 - 게줄당기기 - 판굿
- 놀이의 구성
- 당산굿 : 게줄을 당길때는 게잡이를 하는 이권도 있었으나 그 시기가 정월보름과 7월백중때가 되므로 자연히 농가에서는 1년동안 마을의 안녕과 농사가 잘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온갖 치성을 다 드리게 되는데 이곳 감천에서는 서방의 당산이 있어 색다른 고사를 지낸다.
- 농발이놀이 : 당산굿으로 마을의 안녕과 필승을 비는 치성을 드리고 판굿 으로 한바탕 놀면서 “神”을 울린 다음 농발이놀이로 장사 줄다리기 역군울 뽑는다. 이때 首農夫를 손가마에 태우고 나무구 시(소죽통)와 지게목발 장단에 흥겨운 춤과 노래(밀양아리랑)로 사기를 북돋운다.
- 터빼앗기 : 춤판이 끝나면 이어 터빼앗기를 하는 발(竹簾)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싸움은 수농부끼리 작은 줄을 당기기도 하고 “미지개”를 할 때도 있다. 이 터빼앗기 싸움에서 이긴편은 줄다리기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발싸움이 끝나면 젖줄다리기가 시작되고 젖줄다리기가 끝나면 각기 농악을 선두로 장내를 뛰놀다가 게줄쪽으로 가서 원줄(게의 몸둥이 부분)에 걸어 맨다.
- 게줄당기기 : 줄도감이 울리는 징소리에 따라 시작되는데 줄은 양쪽 각각25명이 작은줄을 메고 하나둘 해서 백까지 헤아릴 동안(약3분)다리는데 중앙에서 많이 끌고간 편이 이긴다.
- 판굿 : 이 놀이는 게줄당기기에서 진편은 앉고 이긴편은 쾌재를 부르면서 장내를 돌다가 진편을 일으켜서 화동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지명유래
- 장승배기 : 감천리 당산의 하나로서 마을 사방에 당산이 있는데, 동북쪽에 뒤왕산, 서남쪽에 짐대거리, 서북쪽에 박씨할매, 그리고 동남쪽에 있는 것이 장승배기이다. 아마도 옛날에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뒤왕산,짐대거리,박씨할매 모두 특이한 이름이나 그 어원은 알수 없으며 동남 당산과 서북의 박씨할매 당집은 그대로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날 당산제와 함께 박씨할매 당집에서도 제를 올리고 있음.
- 박씨할매 당집유래 :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년전 자식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아가던 박씨할매가 "내가 죽거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전답을 마을의 소유로 하고 매년 제사를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신 후 세월이 흐름과 동시 그 재산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렸으며 지금까지 매년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음.
- 龍尺 마을 : 조선 초기 박거명이 존거 하였다고 하나 마을의 기원은 알 수 없다. 용척을 龍啼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한 전설이 있다. 옛날 송정마을 우물 근처에 한 뛰어난 장사가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가 우물을 수축하기 위해 우물 속에 들어간 뒤에 위에서 흙과 돌을 내리덮어 생매장시켰다. 그랬더니 龍馬 한 마리가 나타나 슬프게 울면서 용척 뒷산으로 해서 上天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용 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정기 노선버스는 없으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로 5분 정도 거리
특산물
딸기
- 재배여건 : 비닐하우스
- 출하시기 : 12월 - 5월
오례리
부북면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화악산 지맥인 고안산 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 시루본 줄기에 둘러 쌓이 곳으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며, 마을 앞으로 지방도 1017호선이 지나고 있음.
마을소개
유물, 유적
- 의첨재(依瞻齋)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0호 의첨재(依瞻齋)는 부북면 오례리에 있는 함평(咸平) 이씨(李氏) 제숙소(齊宿所)이다. 광해군때 무과(武科)에 올라 호군(護軍)을 지낸 이선지(李先智)가 어머니의 묘소 아래에 의막(依幕)을 짓고 살던 집이 였는데 집터만 남아 전해오던 것을 후손들이 숙종 년간(1674-1720)에 제살(齊室)로서 중창하였다. 그후 수차례에 걸쳐 건물을 수축해 오다가 고종 34년(1897년)에 종손인 이만헌 (李萬憲)이 종중의 의견을 모아 현재와 같이 중수(重修)하였다. 정당(正堂)은 높은 축대위에 건립된 5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을 설치하였는데 왼편에 1칸, 오른편에 2칸이다. 정당의 맞은편 입구에 대문채가 있는바 좌우에 행랑방(行廊房)과 부엌이 각각 붙어 있고 가운데에 우뚝한 솟을대문이 설치되어 3문(三門)의 형식을 갖춘 고자사(庫子舍) 겸용의 건물 이다. 정당의 뒷편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는데 본래 이선지가 살던 8칸 정침의 집터로 전해오며, 최근 주춧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당에는 안동인(安東人) 김녕한(金寗漢)이 지은 "의첨재기(依瞻齋記)"가 붙어 있다.
버스시간표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북-1 버스 이용 가능, 1일 3회운영
지명유래
- 오례리(五禮里) : 임진왜란 전에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가 모부인(母夫人) 장씨(將氏)를 따라 외향
(外鄕)인 부북 지동(府北 池洞 - 現在 提大里)에 이거(移居)하여 살았으나, 1611년
광해(光海 3년)에 이곳 오례리(烏禮里)로 전거(奠居)하여 살았는데, 그의 충효(忠孝)와
예의(凡節)이 출중(出衆)하여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그 뒤 오례(烏禮)를
오례(五禮)로개칭(改稱)하였다고 전해진다.
- 자라산 : 운전리에서 오례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산인데, 산의 형상이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양
같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인데, 왜정시(倭政時) 수리시설(水利施設 施工中)에 산을 끊어 자라의
몸둥이만 남아 있고 자라목은 잘려져 있다.
- 三豺狼山 : 마을 동북쪽의 뒷산인데, 산형이 세 마리의 승냥이와 늑대가 버티고 서 있는 형상같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 조롱산(照龍山) : 마을서편 산인데 산 형상이 조롱박 같이 생겼다고 하여 생겨진 이름이다. 옛날 성지(聖智)가 구산(求山형)을 하다가 이곳이 명산이라하여 묘(墓)터를 잡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 등걸바위 : 오례리 서편 산위에 있는 바위이다. 마을에서 내다보면 바위가 유난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덩그렇게 툭 튀어나 보였기에 덩그런 바위라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 장군소(將軍井) : 마을 서쪽에 있는 샘 이름인데 물을 마시면 힘이 세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오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물을 마셨는데, 그 때는 온 고을에서도 오례리 사람들의 완력(腕力)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더러는 힘을 믿고 저질러 지는 부당한 장난도 있고 해서 은근히 걱정하는 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어느날 노승(老僧)이 나타나 이 샘의 수맥(水脈)을 잘랐다고 한다, 그로부터는 장군소의 물도 효험이 없어졌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장군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
찾아오시는 길
시내에서 오시면 면소재지인 운전리를 지나 자가용으로는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덕곡리
화악산에서 종남산까지 이어지는 긴 산맥의 중앙부에 고암산이 있고 그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북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몇 개의 자연마을 인 본땀마을, 못안마을, 새터마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담 마을 앞에는 덕곡 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다. 밀성 손씨의 집성촌이다.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조선 중엽에 밀성손씨 일족이 전거(奠居)하기 시작 했는데 촌전(村前)의 농토가 비옥(肥沃)하고 수원이 넉넉하여 생활이 풍요로워 졌으며 인심이 정후(渟厚)하여 후덕(厚德)한 마을이 되었다. 이로 인해 덕실(德谷)이라 이름 붙혀졌다 한다. 마을 이름에 의거하여 손(遜)씨들의 상덕제 (尙德濟) 덕곡제(德谷濟) 라는 제실(濟室)이 있고 한편 김(金)씨의 운곡제(雲谷濟) 가 있다.
버스시간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북-1 버스 이용 가능, 1일 3회운영
지명유래
- 꼬꾸랑산(高岩山) : 일명 고강산(高岡山))이라고도 하며, 고암산(高岩山) 정상의 바위가 멀리서 바라보면 꼬구랑하게 보인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산모양을 보고 꼬꾸랑산, 꼬꾸랑산하고 부른 것이 산이름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산정 아래에 큰 외돌 바위가 있는데 굿바위라고 하며, 인근 무속(武俗)들의 기원처(祈願處)로 되어 왔었다.
- 약물샘 : 꼬꾸랑산 굿바위 밑의 칠분 능선(稜線) 쯤에 일시에 수십명이 들어가 비를 피할수 있는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 大旱不渴의 샘이 있고 물 맛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약물샘이다.
- 음산골 : 일명 듬지골 이라고도 하며, 운정(雲汀) 고개의 북쪽 산골인데 골이 깊어 초봄까지 눈이녹지 않는다 으슥하고 음산한 기운이 숨이 막힐 정도라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며, 자가용으로는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특산물
꽈리고추
청운리
부북면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24호선이 마을인근을 지나고, 화악산에서 이어지는 고암산 능선 동쪽에서 약간 떨어진 들마을이다. 부북평야 전부를 관망할수 있는 탁트인 마을로서 본땀, 상촌, 중촌, 적항등 4개 자연 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주요 작물로는 수도작, 고추, 딸기 등을 생산하고 있음.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청운리의 원래 본명은 적항리 였고, 덕곡 일부와 대항리의 일부까지 포함된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동명(洞名)이 청운리로 바뀌어져 불리게 되었으며, 밀주구지 (密州舊誌)에 의하면 청운정(靑雲停)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어 동민들의 유음소(遊飮所)가 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그 정자가 없어지고 이 정자의 이름이 동명(洞名)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유물, 유적
- 청운리안씨고가(靑雲里安氏古家)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3호
부북면 청운리에 있는 광주(廣州) 안씨(安氏)의 고택(古宅)으로 조선조 말기 경상도
지방의 상류가문의 건물이다. 1840년대에 의관(議官) 안붕원(安鵬遠)이 이곳으로 옮겨온
뒤 그 아들 훈재(塤齋) 안종문(安鍾文)과 호재(호齋) 안종익(安鍾翊) 형제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효우(孝友)를 독실히 하고 가정을 일으킨 결과 한때는 3천석의 수곡(收穀)을
받는 큰 지주(地主)가 되었다.
건물의 배치 상태는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내당(內堂)과 좌우의 별채, 사랑채, 좌측별채에
연접한 중문채 등으로 구(口)자형을 이루었고 외정(外庭)에는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에
조산(造山)을 중심으로 정원을 꾸몄으며 좌우에 있었던 행랑(行廊)과 창고등의 건물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이 고택은 1870년대에 안종문이 정침과 좌우에 별채 2동, 대문 등을 지었고, 1890년경에
그의 아들 안동수(安東洙)가 사랑채, 행랑채, 창고, 바깥대문 등을 충축했다.
정침(正寢)은 내정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가운데 2칸의 마루와 좌우 1칸씩의
방이 있고 동편에 부엌이 딸린 5칸 2열의 팔작지붕이며 오른쪽에 대청이 있고 왼쪽에
방을 두었다. "화납정사(華南情舍)"라는 당호(堂號)와 "인지위덕(認之爲德)"이란
편액(扁額)이 대청 도리에 걸려 있으며 마루 뒤쪽에는 판자벽을 두고 창문과 툇마루를
두어 내정과 연결 하였다. 정침과 사랑채 전면에 유리를 끼운 격자 여닫이 문을 장치
하였으나 당초의 구조가 아니며 후일 개수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빗돌배기 : 도촌 마을에서 가산리로 가는 길 가 동 경계(洞 境界) 지점에 오래된 석비(石碑)가 있었
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언제, 누가 세운 빗돌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이 곳 사람들은
옛날 대항리에서 살았다는 영상(領相) 남상(南裳)과 우찬성(右贊成) 현석규(玄碩圭) 등
세도가(勢道家)들의 위세(威勢)로 이 지점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허산(許山) : 상촌 뒷산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아 와우산(臥牛山)
이라고도 한다. 허산(許山)이라는 이름은 허씨(許氏)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 이마을에 살던 허씨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인 명당터에 발복(發福)
하여 부(富)를 누리고 살았다고 한다.
- 도촌(道村) : 청운리 본땀인 도촌은 里中을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상촌과 중촌으로 나뉘어져
있고,도촌 이라는 이름이 무슨 연유로 생겼는지는 알수 없음.
- 상촌(上村) : 청운리 도촌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許氏 와 金氏 등이 세거(世居)한
마을이다. 본땀인 도촌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상촌이라 한다.
- 중촌(中村) : 마을의 중심부(中心部)에 있다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며, 면소재지인 운전리를 지나 10분 거리에 있으며, 밀양역에서 45분 마다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국도 24호선인 마을앞에서 내리면 된다.
특산물
딸기
- 재배여건 : 비닐하우스
- 출하시기 : 12월 ~ 5월
가산리
국도 24호선이 마을앞을 지나고 있으며, 화악산 지맥 하나가 서편으로 내리 뻗어 그 여세로 독산을 솟게하여 그 앞쪽 기슭에 마을을 이루게 한 곳으로써 마을이 생긴 유래는 분명치 않고 다만, 1726년(영조 2년)에 설연과 설찬의 형제가 함안에서 이주하여 왔으며, 주요 작물로는 수도작, 고추를 재배 생산하고 있는 마을임.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효자각과 가산제 마을입구에 정문은 설광욱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고 마을안의 간산제는 이곳으로 전거한 설연, 형제의 만년의 장수소로 1779년 창건된 것이며, 마을 뒤쪽의 독산은 북풍을 막아주고 마을앞의 숲은 마을의 후덕한 인심을 상징 하기도 함.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
찾아오시는 길
시외버스 터니널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걸리며, 자가용으로는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
특산물
꽈리고추
기타
마을 뒤에 현재는 폐교된 (구)월산초등학교가 있으며, 지금은 밀양연극촌으로 바뀌어 주말이면 부산 등 인근 대도시에서 연근관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음.
대항1리
부북면의 북쪽에 마을로서 華嶽山의 한 줄기 지백이 서쪽으로 뻗어내려 許項山,兄弟峯,明坊峴등으로 이어 지고, 다시 동으로 구부러져 洞口쪽을 감싸고 있으니 이것이 마을 案山이다. 이 안산을 一字峯 또는 芭蕉峯 이라고 부른다. 화악산 분수령에 흘러내리는 물이 또한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舟)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옛 사람들이 玉壺洞天行舟形이라고 찬미 했다고 한다. 대항리는 平田,鳳泉,上項이,中項,下項,華南,井洞등 7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고 그 중에 하항,화남,정동 등이 대항1리에 속한다. 대항1리에는 경주최씨, 밀성 박씨, 아산장씨들의 집성촌으로 주로 논 농사위주이며 원예작물로는 고추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三池塘소 :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 南袞의 태생지가 대항2리 457번지 일대로, 원래 남곤은 의령 사람인데 그의 부 친이 河備의 사위로 처가인 이 곳에 와 살았다. 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남곤은 외사촌인 河沖과 더 불어 畢齋 金宗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종 25년에 급제, 출사하여 대사헌, 대제학, 영의정을 지내고 文敬이라는 謚號까지 받았다.
그런데 중종조의 을묘사화를 주도하여 조광조 등 유명한 신진 학자들을 죽인 사건으로 그의 사후에 奸 賊으로 몰려 削奪 官職되었다.
그후 남곤과 같은 인물을 낳았다 하여 남곤 사후 이곳 지맥을 끊기 위해 배(舟)의 형국인 대항에다 가 세 곳에 못을 팠다고 한다.
이 곳이 三地塘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3개처의 지당 중 두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하 항 지금의 사랑골 洞口 산 밑에 이끼 낀 낡은 못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이다.
유물, 유적
- 思井齊 : 사랑골에 朴世健의 遺德을 追慕하기 위한 舍堂이다. 이밖에도 來讀齊, 永思停, 默窩齊, 追感齊, 四而堂등이 있다.
- 洞祭 : 대항1리 마을 전체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 전체의 안위, 풍년, 행운을 기원하 는 대동제를 올리고 있다.
버스시간표
지명유래
- 大項里 : 고려시대에 白씨가 살았다고는 하나 확실치 않고 지금 世居하고 있는 하씨, 황씨, 장씨 등이 1450년경을 전후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내력만 남아 있다. 마을이름이 한목, 또는 壽洞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수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산수가 좋아 壽를 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고 예부터 화악산하에 4개의 壽洞이 있는데 그중 3개동은 경북 청도군에 있고 1 개동만 여기에 있는 셈이다. 옛부터 경향 여러 곳에서 명사들이 많이 와서 살았고 또 여기서 태어나기도 하였다.
- 下項 : 대항리의 아래 부분에 해당하므로 아랫목, 즉 하항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마을 취락 형성의 기원 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蔣椿壽가 부북 池洞(현 부북면 제대리)에서 이 마을으로 이주하게 되었 는데 임진왜란시에 화악산으로 피난하였다가 왜란후 돌아와 후손들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굴머리 :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조선조 순조시하고 하는 말도 전해온다. 동명 굴머리는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알수는 없고, 雲住庵에서 보면 굴머리 마을 위치에 구름머리 (雲頭)가 걸려 있어 구름머리라 하다가 그후 말이 변하여 굴머리로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華南 : 화악산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 井洞(仕郞谷, 巳郞谷) : 이 곳에 취락이 형성된 년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옛날은 대항리 赤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부북면 청운리가 적항리였던 시절에 대항리 일부가 적항에 속했던 것을 설명하 는 듯하다. 동명의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밀성 박씨일문이 세거하고 있 다.
- 雲住庵 : 화악산 주봉 聞옛月臺의 아래쪽에 있는 암자이다. 신라 고찰인 봉천사에 속했던 암자로 창건 년대는 알 수 없다. 본사가 없어지고 靑蓮庵, 白蓮庵등 부근 암자들이 다 폐허가 된 뒤에도 이 운주암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것은 화악산에서 차지한 그 절묘한 위치 때문인 것 같다. 소 금강이라고 할만한 아름다운 암벽을 배경으로 하고 만장의 層崖위에 자리잡아 남쪽으로 백리 산천의 雲物이 一에望無盡한 眼界를 열어준다. 한때 불도에 정진하는 학승이 있었던 것 같다. 화악산 운주암 刊行이라는 刊記가 있는 불서가 서울의 장서가의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아 도 알 만하다. 운주암이란 이름에 대해서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암자의 위치가 높아 구름 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산을 돌아다니는 승들이 구름처럼 와서 머물다 가 또 구름처럼 떠나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걸리며, 자가용으로는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특산물
꽈리고추
기타
경주최씨, 밀성박씨, 아산장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주민 모두가 가족처럼 지내, 인정이 넘치는 마을로 전통풍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예절바른 마을로 인근 마을에서도 소문이 자자함 .
대항2리
부북면의 북쪽에 마을로서 華嶽山의 한 줄기 지백이 서쪽으로 뻗어내려 許項山,兄弟峯,明坊峴등으로 이어 지고, 다시 동으로 구부러져 洞口쪽을 감싸고 있으니 이것이 마을 案山이다. 이 안산을 一字峯 또는 芭蕉峯 이라고 부른다. 화악산 분수령에 흘러내리는 물이 또한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舟)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옛 사람들이 玉壺洞天行舟形이라고 찬미 했다고 한다. 대항리는 平田,鳳泉,上項,中項,下項,華南,井洞등 7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고 그 중에 평전,봉천,상항,중항 등이 대항2리에 속한다. 대항2리에는 진양하씨, 장수 황씨들의 집성촌으로 주로 논 농사위주이며 원예작물 로는 고추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남곤(南袞)이 딱밭 :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 南袞의 태생지가 남곤이 딱밭이라 불려지고 있는 지금의 대항2리 457번지 일대 인데, 원래 남곤은 의령 사람인데 그의 부친이 河備의 사위로 처가인 이 곳에 와 살았다.
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남곤은 외사촌인 河沖과 더불어 畢齋 金宗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성 종 25년에 급제, 출사하여 대사헌, 대제학, 영의정을 지내고 文敬이라는 謚號까지 받았다.
그런데 중종조의 을묘사화를 주도하여 조광조 등 유명한 신진 학자들을 죽인 사건으로 그의 사후에 奸 賊으로 몰려 削奪 官職되었다.
그후 남곤과 같은 인물을 낳았다 하여 남곤 사후 이곳 지맥을 끊기 위해 배(舟)의 형국인 대항에다 가 세 곳에 못을 팠다고 한다.
이 곳이 三地塘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3개처의 지당 중 두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하 항 洞口 산 밑에 이끼 낀 낡은 못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이다.
유물, 유적
- 永慕齊 : 晉陽 河氏 齊舍의 하나이다. 永慕라는 것은 영원히 부모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여기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때 향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린 소년 河再淨이 난리 화중에 황급히 한 목 집으로 달려 왔으나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피란을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 처남인 진 주 류씨 집안에 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하재정의 외숙은 어린 생질을 데리고 경북 청송으로 피난하여 임진왜란의 참호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피란 끝에 귀향해보니 촌락은 황폐하고 부모님의 생사조차 알길이 없었다. 그는 외숙의 도움으로 마을 뒤쪽 한골에 터를 잡아 초당을 짖고 기거하면서 전화중에 여읜 부모를 영원히 사모한다는 뜻을 남겼다. 뒤에 영모제라는 제 액이 붙게 되고 후손들의 합력에 의해 齊舍가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모제에는 매년 진양 하씨 문중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이밖에 東岡齊,追慕齊,報本齊,杜谷停, 晩悔齊,梧月停등이 있으나 그 명칭의 유래는 설명할 수가 없다.
- 膽慕堂 : 黃氏의 齊舍이다. 담모는 선조의 墳墓와 遺蹟을 膽望, 思慕한다는 뜻이다. 처음 黃鍾耉가 그의 고조의 무덤앞에 집을 짓고 金谷壓이라고 했는데 玄孫 黃起原이 현위치에 이축하고 담모당이라 고 하였다. 그 외에도 蒙養齊, 復攸齊, 歸園亭 등이 있다.
- 洞祭 : 대항2리 마을 전체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 즉, 정월 열나흘 날에 마을 전체의 안 위, 풍년, 행운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리고 있다.
버스시간표
-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大項里 : 고려시대에 白씨가 살았다고는 하나 확실치 않고 지금 世居하고 있는 하씨, 황씨, 장씨 등이 1450년경을 전후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내력만 남아 있다. 마을이름이 한목, 또는 壽洞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수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산수가 좋아 壽를 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고 예부터 화악산하에 4개의 壽洞이 있는데 그중 3개동은 경북 청도군에 있고 1개 동만 여기에 있는 셈이다. 옛부터 경향 여러 곳에서 명사들이 많이 와서 살았고 또 여기서 태어나기도 하였다.
- 上項 : 대항리의 윗 부분에 해당하므로 윗목, 즉 상항이라고 한 것이다. 1454년(단종 3년 을해년)에
洞直 河備기 이곳에 伏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 中項(중땀, 중마을) : 상항과 하항의 중간에 있어서 중마을, 즉 중항으로 불려진 것이다. 長水 黃氏 일족 의 집성촌으로 처음 입주한 黃鶴은 유명한 방村 黃喜 정승의 증손으로 조선조 성종 때 護軍이라는 官職을 가진 사람으로 퇴직한 뒤 이곳으로 낙향했는데 어떤 연고가 있는지 미상이다.
- 평밭 : 화악산 동쪽 봉 아래쪽에 자그마한 취락이 있는데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산 위에 약간 평평한 곳이라고 해서 평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 碧水洞 : 상봉의 분수령에서 나오는 물과 평전 분지에서 모여든 물이 합해져 흐르는 계곡에 자그마한 폭포가 있고 그 밑에 파여진 작은 못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여름에 피서를 즐긴다. 이것이 벽 수폭포이다. 계곡 주위에 푸른 수목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항상 있는 곳이라고 해서 벽수동이 라고 한다.
- 鳳泉洞 : 화악산 중턱에 옛날 鳳泉寺라는 신라 고찰이 있었고 절 밑테 5,6호의 민가가 살았다. 지금도 탑, 부도 등 석조물의 단편과 민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 봉천이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길 이 없다. 절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있었는데 인근 산에 묘를 쓰고부터 폐사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현재 문헌상으로 남은 곳이 없고 오직 孫台佐의 시 한수가 舊密州誌에 남아 있을 뿐이다.
- 망바위 : 평전 분지 가운데 있는 許項山 꼭대기에 큼직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가 큰 평밭 과 작은 평밭을 굽어보며 망(도둑을 지키기 위해 척후병 역할)을 본다고 하여 망바위라고 이 름한 곳이다.
- 양수바지 : 평전에서 벽수동을 거 쳐 내려오는 물과 봉천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되는 지점의 이름이다. 이 지점에서 동쪽을 보면 산중턱쯤에 옛날 은광이 있어 채은 했다는 폐광된 굴 이 있다. 이 곳을 은구더기라고 한다.
- 황등걸굴 : 형제봉 남쪽 팔부능선에 넓지막한 들겅(산 비탈에 부서진 암석만 있고 풀이나 나무가 없 는곳)이 있는데, 거기에 십척사방의 석굴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온기가 감돌았다 고 한다. 임진왜란때 중땀에 살던 황씨가 피란을 하였다고 한다. 황씨 피란굴이라 하여 황 등걸굴이라고 이름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찾아오시는 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며, 자가용으로는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특산물
꽈리고추
기타
진주하씨, 장수황씨, 아산장씨 등의 집성촌이라 주민 대다수가 문중 단위로 움직여 화합과 인정이 넘치 고 아직 옛 풍습이 많이 남아있어 서로 인사를 할 때도 큰절 내지는 반절을 하고 있고, ?날부터 산세 가 수려해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마을임.
퇴로리
화악산 아래 자리잡은 마을로써 마을 앞엔 가산저수지 뒤로는 대각정사 사찰과 여주 이씨 재실인 삼은정이 소재하여 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며, 여주 이씨 집성촌 이였으나, 현재는 함평이씨와 여러 성씨가 어울려 농업을 주업으로 살고 있음. 옛 정진초등학교는 폐교 되고, 그 자리에 밀양 임실치즈스쿨이 있음.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退老라는 마을 이름은 원래 우리말로 무라채이다. 어떤 緣由에서 "무리채"라는 이름이 나왔는지 語源은 알 수 없지만 무리채의 原型은 "물리 채" 혹은 "물리 치"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것을 漢字로 代置한 것이 退老라고 여겨진다. "물리"는 "퇴"에 해당되고 "치"는 "로"에 해당된다.
유물, 유적
- 퇴로리이씨고가(退老里李氏古家)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2호
밀양시 부북면 퇴로2길 26-1에 소재하며 퇴로리에 거주하는 여주(麗州) 이씨(李氏)의 종택(宗宅)으로 조선조 후기인 1890년에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건립하여 100여년 동안 5대에 걸쳐 보존된 전통적인 고가(古家)이다. 이집은 기와를 얹은 흙담장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정침(正寢)과 중사랑(中舍廊), 그리고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八作)지붕으로 "청덕고가(淸德古家)"라는 당호(堂號)가 있는 집이다. 중사랑은 아들인 성헌(省軒) 이병희(李炳喜) 거쳐하면서 독서 하던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며 "성헌(省軒)"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벽채에도 내당과 외당이 있는데 "쌍매당(雙梅堂)" 죽려지실(竹濾之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동서익랑(翼廊)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그 밖에도 후원(後園)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조화롭게 정원이 꾸며져 있다. 이 종택(宗宅)의 담장 밖에는 일문(一門)의 제숙소(劑宿所)인 천연정(天淵亭 : 원래는 報本堂)이 있고, 서촌에는 항재, 성헌 부자의 서고정사(西皐情舍)와 한서당(寒棲堂)이 있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明堂터 : 퇴로 본땀 중앙부에 있는 집터인데, 예로부터 명당터로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道指定文化財로 지정된 驪州 李氏 所有의 古家가 명당터를 지키고 있다.
- 덕 껄 : 퇴로 본땀을 중심으로 각단과 서쪽 각단으로 나누어 지는데, 덕껄은 동쪽 각단의 한 부분이다. 덕껄의 뜻은 미상이다
.
- 退老 水利 못 : 1931년에 축조된 저수지로 넓이 63町步l고, 둘레가 10리나 되는 큰 호수이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버스로 약 20분 정도 소요되며, 자가용으로는 15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특산물
풋고추
월산리
부북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뒷동산 너머 에 저수지가 소재하는 평야마을로서 안마, 정주마 새마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안마 정주마을 에는 함평이씨, 새마에는 김해 김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시설농업과 쌀농사를 주업으로 살고 있음 마을 앞의 넓은 들은 일찍부터 경지 정리가 잘되었고 수리 시설이 완벽하여 농업 여건이 좋음.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月山里라는 里名의 달(月)은 닭(鷄)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금의 屛山(兵山)은 옛날부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形局이라고 하여 닭산, 또는 鷄山으로 부르다가 닭의 발음이 '달'로 되고, 그러다가 달산 또는 月村으로 通稱되면서 다시 月山으로 되었다고 한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停舟마을(정주땀) : 월산리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李斗運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더니 별안간 소금을 가득 실은 배 한 척이 이 지점에와서 멈추어 서고 닻을 내리더라는 것이다. '기이한 일이로다'하고 꿈을 깼다. 날이 밝아 이리저리 해몽을 하였는데 이 꿈은 분명한 길몽이며 배가 멈춘 그 지점이 吉地이니 住居를 옮기라는 啓示임이 틀림 없다고 판단 하고 곧 家役을 서둘러서 移住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가 머문 곳이라고 하여 땀 이름 으로 停舟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버스로 약 20분 정도 소요되며, 자가용으로는 15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면소재지 운전리를 지나 차량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특산물
딸기
- 재배여건 : 비닐하우스
- 출하시기 : 12월 ~ 5월
기타
마을 앞에 현재는 폐교된 (구)월산초등학교가 있으며, 지금은 밀양연극촌으로 바뀌어 주말이면 부산 등 인근 대도시에서 연극관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음.
2001년초 신축한 마을회관은 경로당과 마을주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주민들 인심이 좋을 뿐 아니라, 가구당 경지면적이 비교적 많은 편으로 옛날부터 잘사는 마을이었음을 알수 있다.
위양리
화악산 줄기를 등에 업고 동으로는 옥교산, 동남으로 자일봉, 남으로는 병산, 서쪽으로는 나지막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며, 본담인 양양마을과 신기, 참나무정,구장동,신구장동,내양,도방동이 합쳐져 행정리 를 이루고 있으며, 위양리 세대수 150여호로 농업이 주업 이나 근년에는 축산, 시설채소(고추, 깻잎)를 재배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임.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위양리 : 위양리는 밀양구지에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 이 마을이 원래 陽良部曲이었다고 밝혀 놓았다.
部曲이란 대체로 신라시대에 설치된 곳이고 또 部曲의 단위가 한 촌락에 거치는 것이 아니고 몇 개의 村落을 포함한 지방 행정 말단의 독립된 한 단위를 뜻하는 것이니까 아마 옛날의 陽良部曲은 지금의 위양리를 중심으로한 주변 지역일원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말, 조선초에 部曲이 해체되어 일반 村落으로 분화되었을 때 종래 部曲의 중심지 즉 部內에 해당 하는 마을이 部曲의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오는 관례를 비추어 볼 때 현 위양리는 陽良部曲 당시 의 部內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 유적
- 양양지(陽良池 : 일명 위양못)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67호
부북면 위양리의 동쪽에 있는 양양지(陽良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제방(堤防)의 둘레가 4.5리(里)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수리구역 (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547척(尺), 너비 68척(尺)으로 줄어 들었다. 양양제(陽良提) 제방 위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일문의 제숙소(薺宿所)인 완재정(宛在亭)이 있는데 원래는 못 가운데 다섯 개의 섬이 있었으며,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고, 제방위에 각종 나무를 심어 인위적으로 풍치(風致)를 가꾼 명소(名所)였던 것 같다. 밀주구지(密州舊誌) "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년(1634년)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위양(位良) :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동국여지승람을 인용(引用)하여 이 마을이 원래 위양부곡 (位良部曲) 이였다고 밝혀 놓았다. 부곡(部曲)이란 대체로 신라시대에 설치된 것이고,또 부곡의 단위가 한 촌락(村落)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몇 개의 촌락을 포함한 지방행정 말단의 독립된 한 단위를 뜻하는 것이니까 아마 옛날의 위양부곡(位良部曲)은 지금의 위양리에 한하는 것이 아니고, 위양리의 주변 일원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생각되나 취락 형성의 내역은 분명치 않으나 원래 손씨의 세거지에 손충보의 여서 권삼섭이 입주하 여 지금 권씨 자손들이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으며, 반면 손씨는 임란후 영산 길곡으로 이주 했다고 함.
- 참나무정 : 이 부근에 참나무가 울창하여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 놀면서 참나무정이라고 부르게 되 었다고 한다. 지금은 4,5호가 살고 있다.
- 九壯洞 : 장차 이곳에 구명의 장사가 나와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큰 일을 해낼 것이라는 희망적인 예언 이 전한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사로부터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지맥을 절단한 곳이라 고 한다.
- 내양 : 위양의 안쪽 동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지싯골이라고 한다. 지싯골은 제석동의 와전된 명칭인 데 옛날 이 골짜기 서편에 제석사라는 암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란 이후 여양진씨가 기거하였으나 지금은 타 성시도 거주하고 있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자가용을 이용하면 시내에서 면소재지인 운전리를 지나 봉계동 3거리에서 우측으로 약 5분 거리에 있는 마을입구에서 내리면 되고, 자가용을 이용하면 시내 에서 북.서쪽으로 약 10분이 소요된다.
특산물
풋고추
기타
부북의 북쪽에 자리잡은 화악산 입구에 있는 마을로서 화악산 등산객들이 많이 지나는 편이며 마을입구에 있는 위양저수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탄하여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아오기도 한다.
무연리
부북면의 북동쪽에 위치한 서향마을로서 옥교산,비봉산 차일봉등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농업이 주업인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본담인 무정과 연포 2개 마을이 합쳐져 행정리를 이루고 있으며, 세대수는 130여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근년에 와서는 독뫼 뒷들에 축산농가가 집단입주하여 단지를 이루고 있으며 마을 주요 원예작물로는 풋고추 및 노지 들깻잎이 주로 생산되고 있음.
마을소개
마을약사( 전설)
- 獨山(독메산) 정상 분묘(墳墓)의 주인공에 얽힌 전설 :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家勢가 淸貧한 선비가 老年에 이르러 父子가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八旬이 넘은 어른과 六旬이 넘은 아들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 어느 해 가을에 겨우 쇠솥 하나를 사다가 걸었는데 모처럼 장만한 쇠솥이라, 愛之重之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이 깊어 새벽녘이 가까워질 무렵이였다. 父子가 일찍 잠이 깨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창 밖에서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나서 살그머니 일어나 문 틈으로 내다보니 우장(도롱이)을 걸친 건장한 도둑 놈이 때마침 기울어가는 그믐 달빛 아래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부자는 숨을 죽이고 도둑 놈의 행동만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놈은 거침없이 창 밑에 걸려 있는 솥을 보고 아궁이에 도롱이를 걸친 채로 엉덩이를 내밀어 넣고는 그렇게 아끼던 솥을 등에 짊어지고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였다. 이 父子는 도둑놈이 급히 달아나다가 넘어져 다칠 것이 염려되어 엉겁결에 큰 소리로 "이 사람아 다칠라. 조심하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도둑놈은 들은 채 만 채 그길로 가버렸다. 두 老人 은 하는 수 없이 전과 같이 질솥(질그릇으로 만든 솥)에 밥을 지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새벽녘에 잠이 막 깨려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나서 "그 누구요?" 했더니 "작년에 왔던 도둑놈이 올시다."하고는 사라졌다. 날이 밝아 나와보니 창 밑에 커다란 밀기 (짚으로 짠, 곡식 등을 넣어두는 容器) 하나가 동댕이 쳐져 있었다. 父子가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방에 굴러 넣고는, 이것은 틀림없이 도둑질해 온 것이라고 직감하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 밀기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 주느냐 하는 것이였다. 마침 이웃 마을의 친구 환갑 잔치에 초대되어 갔다. 그 곳에는 인근의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 자리에서 自初至終을 이야기 하고 밀기 주인을 찾아 보았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주인이었다. 다음날 밀기는 내용물과 함께 고스란히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도둑놈이 이 父子를 찾아와서는 뜰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였다. 솥 도둑질이며 밀기 도둑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며 깊이 반성하였다는 것이다. 積善之家에 必有餘慶이란 말과 같이 착한 선비의 후손들은 번창하게 발전하였 으며, 그 어진 넋들은 가는 이 오는 이의 존경을 받으면서 이 곳에 고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飛鳳山下 鳳溪洞과 가까운 곳에 동그란 모양으로 알(卵)과 같이 생긴 길고 조그만 산이 들판에 따로 우뚝 솟아 있어 독메라고 부른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지명유래
- 舞鳶里 : 舞停과 鳶浦의 두 땀을 합해서 나온 것이며, 倭政 때에 된 이름이다.
- 飛鳳山 : 마을 남쪽의 산인데, 鳳이 나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고, 風水說에 의하면 抱卵鳳의 地形이니 반드시 明堂이 있다고 전해오고 있기도 하다.
- 독뫼(獨山) : 飛鳳山下 鳳溪洞과 가까운 곳에 동그란 모양으로 알(卵)과 같이 생긴 길고 조그만 산이 들판에 따로 우뚝 솟아 있어 독메라고 부른다.
- 대방골 : 골이 넓고 평평하여 그 밑으로 넓은 들이 이어진다고 하여 대방골이라 한다. 이 골의 山嶝에는 월산, 춘화 등 兩里의 共同墓地도 있다.
- 사태곡 : 비봉산 아래 있는 황토 계곡으로, 산 사태로 생긴 골이라고 사태곡이라 한다.
- 玉轎峯 : 옥교산의 한 봉우리이며, 海拔高 539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나 화악산의 連脈으로 길게 뻗어 密陽市 校洞 뒷산까지 連해 있고, 그 정 상의 부분에 남북으로 稜線따라 큰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두 바위 사이가 활장같이 옴팍하게 파인 것 같이 보이는 곳을 옥교봉이라 한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으며, 자가용을 이용하면 시내에서 면소재지인 운전리를 지나 약 10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는 마을입구인 연포앞을 지나간다.
특산물
깻잎
기타
2001년 9월 마을회관을 신축하여 경로당 및 주민들의 여가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주민 모두가 화합과 인정으로 넙쳐 흐르는 살기좋은 마을임.
춘기리
법정 춘화리에 속하며 국도 24호선을 좌.우로 하여 도로 위쪽에는 본담이며 아래쪽에는 샛터라 칭하며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예전에는 쌀농사가 주소득원 이였으나, 근래(80년대)에 와서는 농업형태가 바뀌어 대추, 배를 재배하는 농가가 생겼고 또한 소를 사육하여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도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밀주구지에 의하면 저대부곡(楮垈部曲)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있은 듯하며 부곡(部曲)이 해체된 뒤에는 저대리(楮垈里)로 되어 있다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본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황지방들 : 춘기에서 봉계마을로 가는 도로 북편에 위치한 들인데 매우 건조한 농지이다 왜 황지방들이라는 이름이 붙여 졌는지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황지방들에는 메추리 두 마리가 오면 한 마리는 굶어 죽는다고 한다. 토박하고 건조한 들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됨.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편은 30분마다 1대 정도 있고, 밀양시내에서 북.서쪽으로 가다가 면소재지(운전리)를 지나 10분 정도 거리에 있음.
특산물
배
- 재배여건 : 지형적으로 기후가 좋고 일조량이 많아, 배 생산지로 적합 할 뿐 아니라 노지로 재배하는 과일이 굵고 당도가 높아 대도시로 많은 출하를 하고 있음.
- 출하시기 : 9월 ~ 11월
화산리
법정 춘화리에 속하며 비봉산 기슭에 본담마을, 부쇠 바위, 봉계동으로 3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약 3㎞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24호선과 약 2㎞정도 떨어져 있다. 예로부터 저대산(楮垈山) 기슭에 있는 마을로 처음 에는 화산(化山)이라고 하였으나, 언제 부턴가 화산 (華山)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밀주구지에 의하면 저대부곡(楮垈部曲)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있은 듯하며, 옛날 마을 이름에 딱나무 저(楮)자를 사용한 것과 마을 동쪽에 딱지골이 있는 것으로 보아 딱나무가 많이 재배된 지역으로 보이며, 현재는 딱나무를 찾아보기 힘들다.
버스시간표
터미널에서 7:10 부터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시내버스를 이용
지명유래
- 봉계(鳳溪)마을 : 비봉산의 먼 기슭 아래쪽 국도 24호선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계 마을명의 유래는 비봉산의 봉(鳳) 자(字)와 마을앞에 흐르는 청운천(靑雲川)의 계류 (溪流)를 마을명에 관련지어 계자를 따서 봉계동이 된 것이다.
- 부쇠바위 : 화산리 북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이 곳 마을 근처에 부쇠바위가 3개가 현재도 있다. 오래 전 불이 귀할 때 이 곳 바위를 이용하여 불씨를 사용 하였던 곳 으로 부쇠마을이라 한다.
- 굴더미(孔岩窟) : 마을 뒤 비봉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임진왜란때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낸 곳으로 기록에는 조령(趙齡)이란 분이 함안에서 휘하의 8남을 데리고 이 굴에서 피신 하였다고 한다. 굴안에는 아직 돌로 된 문이 있는데, 그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딱지골 : 화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닥나무의 군생지(群生地)로 닥(楮木)이 많이 났다고 딱지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저대산(楮垈山)이라든지 또는 저대리(楮垈里) 라는 이름이 이 골의 닥나무로 인해 생긴 이름인 듯하다.
- 범안골 : 마을 뒤쪽의 꽤 깊은 골인데 범굴이 있었다고 하며, 옛날에는 이 근방에 범이 자주 출몰(出沒)하여 인축간(人畜間)에 호환(虎患)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 효자각(孝子閣) : 밀주구지(密에州舊誌)에 의하면 화산마을에 효자 양말손(梁末孫)의 려(閭)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대신 최근 지방 인사들이 이령헌(李令憲) 부자(父子)의 孝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 봉계 마을 앞에 서 있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편은 30분마다 1대 정도가 있는데 마을입구를 지나고 있으며, 밀양시내에서 북.서쪽으로 가다가 면소재지(운전리)를 지나 10분 정도 거리에 있음.
특산물
배
- 재배여건 : 지형적으로 기후가 좋고 일조량이 많아, 배 생산지로 적합 할 뿐 아니라 노지로 재배하는 과일이 굵고 당도가 높아 대도시로 많은 출하를 하고 있음.
- 출하시기 : 9월 ~ 11월
용포리
면사무소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차량으로 2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으며, 법정리 용지리에 속하며, 함안조씨, 전주유씨, 달성서씨의 집성촌 으로 현재 83가구 230여명 거주하고 있음. 쌀농사가 주업이며 밭작물로는 주로 대추를 많이 재배하고 있음.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용심천(龍심川)에 얽힌전설
玉轎山(옥교산)의 한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자그마한 계류가 되어 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 운전리를 거쳐 부북천으로 합류되는 냇물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 2,3일간 끊임없는 폭우가 내려 쏟아지니 계천이 범람하고 마을, 들 할 것 없이 천지가 온통 물바다를 이루었다. 하늘에는 고운 무지개가 서고 우루루 쾅쾅하는 雷聲 (뇌성)이 요란하더니 밤이 되면서 무지개도 사라지고 요란하던 천동 소리도 멈췄는데, 괴물 모양의 큰 물체가 마을 어귀의 계천, 움푹 파인 웅덩이에서 나타나더니 순간 큰 불덩이로 변하여 하늘로 솟아 올라 가더라는 것이다. 이를 목격한 동민들은 그 큰 괴물이 용이 틀림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 자리를 살펴 보았는데, 그 怪物(괴물)이 스쳐간 계천은 훨씬 넓어 졌고, 움푹 파여진 웅덩이는 네댓 길이나 파여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계천을 용심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
지명유래
- 龍浦 : 지동에서 약 6, 7마장 떨어져 용심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용심천에서 용이 등천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동명(洞名)을 용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운전리 부북농협 앞에서 하차하여 동쪽으로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되며, 밀양시청에서는 북쪽으로 한국화이바 공장을 지나서 오는 2차선 도로도 있음. 자가용 이용시 시청에서 5분 정도면 올수 있음.
지동리
밀양시청 뒤 한국화이바와 밀양공설운동장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뒤로는 옥교산과 마을동서로 야산이 있어 겨울에는 온화하고 따뜻한 마을이며, 영월엄씨와 밀양박씨 집성촌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옥교산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에 龍駕驛이 있었던 驛村마을이다. 고려시대에 龍駕池를 파서 灌漑를 하였다고 하는데 龍駕라는 이름은 龍駕驛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때부터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地洞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마을 서 편에 있는 밭(田)을 마구밭(田)이라 하고, 그때 심어진 대나무가 아직도 자라고 있다. 장자가 살았다는 장자골에도 바위에 만든 어진 맷돌과 집뒤에 심어진 대밭이 있다.
지명유래
- 龍駕(用家)驛 : 지동에서 용포쪽으로 옛길을 따라오면 그 중간쯤 되는 위치에 옛날의 驛이 있었다
驛站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각분야에 걸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驛站에는 驛長과 驛史, 驛卒이 있었다고 한다.
驛站에서 하는 일은 官公署의 公文傳達, 官需物의 輸送, 出張 官吏에게 말과 숙박시설등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 龍駕池 : 지동마을 서남쪽에 있는데, 원래 넓이는 일만오천여평이나 되어 마을앞들의 灌漑에 활용되어 온 것이다. 그후 퇴로못(가산지)의 수리 구역에 편입되어 이 못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空閒地 로 물이없는 이름뿐인 못이되어 6. 25 사변시에는 임시 육군병원의 부지가 되기도 하였고,
지금은 공장부지가 되어 수많은 건물이 꽉 차 있다. 이곳은 風水說에 따르면 만석꾼 이상의 財富가 살 곳이라고 전해진 곳이기도 하였다.
- 長者골 : 地洞마을 서북쪽에 옛날 큰 부자(長者)가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이곳에 우물과 맷돌바 위 등의 遺物 遺址가 남아 있다. 倭政時에만 해도 이 마을에 嚴씨, 金씨의 두 집은 千石꾼의 得名을 하였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
대전리
법정리인 운전리의 본땀이며 일명 '큰굴밭' 또는 '큰마'라고 불러졌으며, 국도 24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내이동과 접한 지역으로 제대천이 흐르 며, 경지정리가 잘되어 농지가 많고 깻잎, 고추 등 시설하우스가 많으며, 최근 면소재지 정비사업으로 마을환경이 깨끗함.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옥교산에서 내려오는 용심천이 대전과 신전을 경계로 흐르고 있었는데, 용심천에서 용이 상천(上天)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용이 상천 하려면 주위의 먹구름이 모여들게 마련이고, 또 이곳은 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雲田(大田과 新田을 합친 법정리명)이라는 리명(里名) 되었을 것이라고 촌노(村老)들은 말한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
지명유래
-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부위(府衛)에서 북쪽으로 십리허(十里許)에 밭이 많은 곳에 새로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해서 구한말정(舊韓末頂)까지 신기리(新基里), 또는 북신기(北新基) 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신전(新田)은 북신기(北新基)에 속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북신기(北新基)는 지금의 대전마을을 지칭한 것이라 보여진다.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20분 정도 소요되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북쪽으로 약2.0㎞ 떨어진 곳에 있으며, 자가용 이용시 시내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음.
신전리
법정리인 운전리에 속하며, 일명 '새 굴밭' 이라는 뜻의 신전마을은 면 소재지인 대전마을 과 연접해 있고, 한국화이바 사원아파트, 우체국 파출소가 소재한 마을임.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이씨(李氏)가 세거(世居)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버스시간표
밀양역에서 운행하는 부북노선 시내버스를 이용
지명유래
- 신전(新田) : 본 땀인 운전리(雲田里)를 큰굴밭이라 칭하고, 인근 '새마'라고 부르다가 신전(新田) 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음.
찾아오시는 길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20분 정도 소요되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북쪽으로 약2.0㎞ 떨어진 곳에 있으며, 자가용 이용시 시내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