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본문바로가기
주메뉴바로가기
밀양시관련홈페이지
밀양시청
문화관광
밀양시의회
일자리지원센터
통합예약
국가상징
이용안내
사이트맵
로그인
Language
English
Chinese
Japanese
닫기
검색어
통합검색
흐림
흐림
13℃
미세먼지
22㎍/㎥
좋음
초미세먼지
5㎍/㎥
좋음
밀양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주메뉴
전체메뉴
로그인
전체메뉴 닫기
밀양 방문의 해
밀양 방문의 해 소개
홍보 사진 및 영상
홍보대사
프로그램 및 이벤트
프로그램
이벤트
교육관광
인센티브
주요행사
밀양관광
밀양8경
영남루 야경
시례 호박소
표충사 사계
월연정 풍경
위양못 이팝나무
만어사 운해
종남산 진달래
재약산 억새
3대신비
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
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
종소리 나는 만어사의 경석
관광명소
산/강/계곡
사찰/유적지
공원/기타관광지
어린이놀이터
체험견학
영화드라마촬영지
밀양촬영지
오구촬영지
똥개촬영지
청풍명월촬영지
방자전촬영지
이달의 아주 핫한 여행지
이달의 아주 핫한 여행지 확인하기
테마관광
추천코스
1박2일 촬영지 코스
시내권코스
무안코스
삼랑진코스
얼음골코스
표충사코스
일정별코스
당일코스
1박2일코스
2박3일코스
탐방투어
사명대사유적지탐방
전통사찰을찾아서
사적지탐방
전통가옥탐방
석탑별탐방
걷고싶은길
밀양아리나
영남루 수변공원길
추화산성길
금시당길
힐링꽃길
밀양강 둔치
상동 명품 장미꽃길
초동 연가길
밀양연꽃단지
산외면 해바라기
삼문송림 구절초
하남 명품십리길
하남 명례 메밀꽃
내일5통 테마길
별달굽이길
곱돌길
달빛쌈지길
백중놀이길
밀양시티투어
시티투어안내
코스상세보기
향교서원 풍류투어
향교서원스테이 1박2일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신청하기
온택트 밀양여행
VR투어
영상여행
역사 · 문화
밀양아리랑
대한민국 3대 아리랑
밀양아리랑이란?
밀양아리랑 영상
밀양아리랑 음원
밀양아리랑 서체
밀양아리랑 로고
박물관/기념관
시립박물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의열기념공원
미리벌민속박물관
한천박물관
얼음골축음기소리박물관
보현박물관
충혼탑
국가유산
문화유산
무형유산
자연유산
문화시설
밀양아리랑아트센터
청소년수련관
밀양아리나
밀양영화고등학교
축제 · 체험
행사 · 공연 일정
일정 확인하기
축제/민속놀이
밀양아리랑대축제
밀양아리랑마라톤대회
지역별 축제
민속놀이
추화산성봉수제
체험코스
부북면 퇴로고가체험
정보화마을
황토체험관
농촌체험휴양마을
농촌교육농장
표충사템플스테이
미리미동국
밀양시국궁장
새미음식문화 예술촌
한천체험관
밀양치즈스토리
밀양강 오리배
체육시설
밀양시시설관리공단
음식 · 숙박 · 쇼핑
음식
전체
모범음식점
위생등급지정업소
착한음식점
밀양돼지국밥
숙박
밀양 도재래 자연휴양림
호텔
모텔/여관
민박
기타
야영장
자동차 야영장
일반 야영장
쇼핑
특산물
전통시장&대형마트
밀양팜(농특산물쇼핑몰)
관광안내
커뮤니티
공지사항
밀양사진 이벤트
공모전 수상작
관광안내책자신청
관광정보
종합관광안내소
관광가이드북
등산안내도
Yes! 펫존
교통정보
공중화장실현황
내가짜는여행코스
여행코스 만들기
#감성추천밀양여행
문화관광해설
문화관광해설사소개
문화관광해설신청
밀양시청
이용안내
관광검색
관광해설
밀양시 인스타
밀양시 블로그
밀양시 유튜브
TOP
전체메뉴
메뉴
VR Tour Service
밀양여행VR
역사·문화
하위메뉴펼치기
밀양아리랑
대한민국 3대 아리랑
밀양아리랑이란?
밀양아리랑 영상
밀양아리랑 음원
밀양아리랑 서체
밀양아리랑 로고
박물관·기념관
시립박물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의열기념공원
미리벌민속박물관
한천박물관
얼음골축음기소리박물관
보현박물관
충혼탑
국가유산
문화유산
국보
보물
국가민속유산
사적
도 유형문화유산
도 기념물
도 문화유산자료
국가등록유산
무형유산
국가무형유산
도 무형유산
자연유산
천연기념물
명승
문화시설
밀양아리랑아트센터
청소년수련관
밀양아리나
밀양영화고등학교
Home
역사·문화
밀양관광
테마관광
역사·문화
축제 · 체험
음식.숙박.쇼핑
관광안내
이용안내
밀양 VR 투어
밀양 방문의 해
국가유산
밀양아리랑
박물관.기념관
국가유산
문화시설
문화유산
문화유산
무형유산
자연유산
PRINT
링크
SHARE
밀양시 페이스북
밀양시 트위터
밀양시 블로그
밀양시 인스타그램
밀양시 유튜브
밀양시 카카오스토리
도 기념물
총
14건
의 문화유산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
1
/ 2 Page)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검색
1
밀양 관아지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중앙로 348(내일동)
문의처
밀양시
소개
지방 수령(守令)이 공무(公務)를 처리하던 곳을 관아(官衙)라 한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밀양의 관아에 대해 “아사내외 동서헌별실백여간임진왜란탕진무여 만력신해부사원유남중창(衙舍內外 東西軒別室百餘間壬辰倭亂蕩盡無餘萬曆辛亥府使元裕男重創)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100여칸 규모의 관아가 모두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1611년(만력 신해)에 와서 부사 원유남이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관아가 모두 소실되자 선조 32년(1599)에 당시 부사 이영(李英)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草屋)을 세워 집무를 하다가 광해군 3년(1611)에 원유남(元遊藍) 부사가 부임하여 당초 터에 관아건물을 재건하였다. 관아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은 부사가 행정을 처리하던 곳으로 「근민헌(近民軒)」이라 불렀고, 동헌의 부속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서헌(西軒)과 별실 등이 있었지만 자세한 용도는 알 수 가 없다. 다만『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등에는 내동헌(內東軒)과 외서헌(外西軒) 건물이 별도로 있고, 내동헌은 부사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북별실(北別室), 책방(冊房: 梅竹堂), 주방(廚房), 창고 등의 많은 건물이 건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1년 중건 후 조선말까지 300여년간 밀양부사가 집무하는 관아로 사용되어 왔으나 개별 건물의 규모와 위치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선후기에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등이 정청 주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며, 이밖에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등의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말기인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개편에 따라 군청(郡廳)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27년에 밀양군청을 삼문동에 신축하여 옮겨 가서 관아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다. 그 후 관아터는 구(舊)밀양읍사무소, 구(舊)밀양시청, 구(舊)내일동사무소의 청사 등으로 이용 되다가 2010년 4월 현재의 모습으로 관아를 복원하였다. 옛 관아에 속해있던 건물 중에 당호(堂號)가 확실히 남아 있는 건물을 살펴보면: ①매죽당(梅竹糖:책방):아사 별실의 하나로 부사의 비서 사무를 맡은 책방이 거쳐하던 건물이자, 부사의 자녀들이 독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당초의 건물은 허물어져 영조 51년(1775 년)에 부사 정존중(鄭存中)이 다시 세웠다가 한말에는 이곳을 부사의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②헐소(歇所): 관아 정문 밖에 인접해 있었는데, 부사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공사의 일로 부사를 만날 사람 은 반드시 이곳을 통하여 성명을 밝히고 쉬면서 대기하는 장소로서 “헐숙소(歇宿所)” 또는 “헐소청(歇 所廳)”이라 했다. ③응향문(凝香門) : 관아의 정문으로 중층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2층에는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 로 문을 열고 닫을 때에 북을 울렸다고 한다.
2
밀양 남산 봉수대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상남면 남산리 산181
문의처
밀양시
소개
봉수(烽燧)는 국경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조정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산정과 산정을 잇는 봉수대는 밤에는 횃불(烽)로서, 낮에는 연기(燧)로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의 기원은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사기 가락국기(三國史記 駕洛國記)』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국법으로 봉수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의종 3년(1149)이다. 봉수의 중요 연락 노선은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등 다섯군데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서울의 남산(木覓山)을 종점으로 연결하였는데 이 다섯 군데를 직봉(直烽)이라 하였고, 보조노선을 간봉(間烽)이라 하였는데 두 노선이 교차되는 것을 합봉(合烽)이라 하였다. 봉수의 신호체계(信號體系)는 평일에는 연기를 1번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번, 적이 국경 가까이 접근했을 때 3번, 국경을 침범했을 때는 4번, 교전(交戰)이 붙으면 5번을 올렸다. 그러나 구름이 많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봉수신호(烽燧信號)가 불가능하므로 봉군(烽軍)이 차례로 달리거나 역참(驛站)의 말(馬)을 이용하여 위급함을 알렸다. 남산봉수(南山烽燧)는 제8번 간봉선(間烽線)에 해당되는 봉수로 밀양관아에서 남쪽으로 약6km지점이며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종남산 둘째 봉우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쪽으로 김해 자암산(子巖山)에 응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산봉수(栢山烽燧)를 신설하고, 북으로는 추화산봉수(推火算烽燧)와 연결하였는데 남북 봉수대간의 거리는 각각 8km로 고종 31년(1894)에 봉수제도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이용되었다. <참고 : 밀양의 봉수(烽燧)는 가덕도 연대산봉수대에서 침입하는 왜적들의 동태를 파악하여⇒녹산 봉화산(일명: 성화례산) ⇒김해 분산 ⇒자암산(진영 봉화마을) ⇒밀양 백산⇒종남산⇒추화산⇒분항산⇒경북 청도의 남산으로 전보(轉報)하는 제8번 간봉선에 해당된다.>
3
추화산성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교동 산9번지외31필지
문의처
밀양시
소개
추화산성(推火山城)은 추화산의 8부 능선에 축조된 삼국시대의 퇴뫼식 산성으로 그 둘레는 약 1,430m이다. 이 산성은 밀양시내 영남루의 북쪽 약 3km 지점으로 성 아래 동북쪽에는 밀양에서 경북 청도쪽으로 통하는 국도가 지나고 있다. 이 지점의 서쪽에 밀양시내로 흐르는 남천강(南川江: 일명,凝川)과 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추화산성은 밀양시 중심부 초입의 요충지에 위치하는 셈이어서 당시의 성곽으로서는 최적지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밀양은 양산, 언양, 김해, 영산, 청도에 둘러싸인 내륙지방으로 낙동강 입구에서 청도, 대구를 잇는 노상에 위치하여 왜(倭)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간의 전투, 고려시대에는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으로 인해 밀양지역이 관련되면서 이 산성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건치연혁조(建治沿革條)에 보이는 밀양의 옛이름이 추화군(推火郡)이었다는 사실은 추화산성의 이름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이 성은 밀양시의 문화재 정비계획에 따라 1990년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성의 구조는 동.서.남에 문지(門址)를 두었으며 북쪽으로 계곡진 평지에는 우물, 연못, 부속건물 등을 배치하였다. 성벽은 석축부분이 많고, 토석혼축(土石混築) 부분은 적은 편이며 축조수법이 경사면의 기단부는 내탁(內托)하고 상단부는 협축(夾築)하는 순서를 취했다. 토석 혼축 부분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양측에 석축을 쌓고, 그 속에 흙을 채워 다져넣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대부분이며, 자기편은 분청자기가 제일 많았고 건물지에서 백자편도 수습되었다. 성 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신라말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초기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봉수대(烽燧臺)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사용된 듯하다. 추화산성은 초기에는 추화군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읍성(邑城)이 현재의 밀양시내에 축조되면서부터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4
천황산 표충사(天皇山 表忠寺)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문의처
표충사
소개
표충사(表忠寺)는 신라 진덕여왕 7년(653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지금의 극락암(極樂庵) 자리에 초암(草庵)을 짓고 수도하던 어느날 아침 재약산 산정을 바라보니 대밭속에 5색 서운(瑞雲)이 떠오르므로 곧 하산하여 그 자리에다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라 불렀다. 지금도 그 흔적이 절 뒤 대밭속에 남아있다. 그 후 흥덕왕 4년(829년)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黃面禪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와서 이곳에 머물 때 당시 흥덕왕의 셋째왕자가 악성 피부병에 걸려 전국에서 명산과 명의를 찾던중 이곳 죽림사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치유하였다 하며, 이에 왕이 크게 감탄하고 탑을 세우고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며 왕자가 마셨던 약수를 영정약수(靈井藥水), 절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하였다. 신라시대 때는 보우국사(普佑國師)가, 고려시대에는 해린국사(海隣國師)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머물며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으며, 특히 일연(一然)스님은 이곳에서 유명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탈고하기도 했고,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에는 일국명찰(一國名刹)이라 일컬은 적도 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하루아침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년)에 혜징화상(慧澄和尙)이 중건하고 숙종 5년(1679년)에 실화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다음 해에 판사 원영(判事 垣英)등 33인이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대규모 가람을 중건하니 8법당(法堂), 4지전(持殿), 17방(房), 15암자(庵子)였다고 전한다. 헌종 5년(1839년) 사명대사의 8세법손 월파당(月坡堂) 천유선사(天有禪師)가 관음전(觀音殿) 옛자리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밀양시 무안면 삼강동 영취산(靈鷲山) 표충사(表忠祠)에 있던 청허(淸虛), 송운(松雲), 기허대사(騎虛大師)의 진영(眞影)과 위패를 옮겨와 모시고 절 이름을 표충사(表忠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절은 주위의 경관이나 절의 형국으로 보아 유서깊은 대찰(大刹)이나 수차례의 화재로 인해 최근세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엿볼 수 있어서 가치가 더한 것이다. 사찰의 배치는 평지형(平地形)으로 대광전(大光殿)과 표충서원(表忠書院)을 중심으로 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5
수산제 수문(守山提 水門)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63
문의처
밀양시
소개
수산제(守山堤)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471-4번지를 기점으로 하여 동북쪽으로 수산리 931번지 도연산(道淵山) 부근에 이르는 약 1km에 달하는 고대 삼한시대에 축조된 향토로 만들어진 제방으로 국농소(國農所)에 범람(氾濫)하던 용진강(龍津江 : 일명 海陽江) 물을 막아주던 역할을 하던 곳으로 전북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충북 제천의 의림지(義林池)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農耕文化遺蹟)으로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삼한시대에 밀양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서 "미리(彌離)는 용(龍) 즉 크다(大)는 뜻이고, "미동(彌凍)"은 모탁(牟 )이나 미동(未冬)등과 함께 물둑, 물동 제방(堤防) 등으로 일컬어서 물과 관계되는 크다란 제방(大堤 : 守山堤)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처음에는 수산제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가 형성되었다가 점차 지금의 밀양시 소재지 방면으로 그 중심권이 이동된 것이라는 견해가 성립되고, 자연스럽게 수산제의 축조연대 또한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수산제 주변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패총(貝塚), 지석묘(支石墓) 등과 함께 수많은 토기(土器)들이 출토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중요한 것은 1986년 11월 24일 하남읍 수산리 972번지 지하 자연암반에서 수문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수산제 수문(水門)인 것이다. 이 수문은 AD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의 입석수문(立石水門)보다 더 원시적으로 자연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진 것이 고증(考證)되어 축조년대가 국내 최최(最初)임이 입증된 바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의 기록을 보면 수산제의 길이가 728보(步)로 되어 있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040m에 달하고 수산제에 포함되었던 이 수문은 높이 181cm, 너비 152cm, 길이 25m, 연결수로 7m의 규모이다. 수산제의 변천과정은『신증동국여지승람(新證東國與地勝覽)』,『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점필제집( 畢齊集)』,『밀주구지(密州舊誌)』등에서 살펴 볼 수가 있는데 고려 충렬왕 원년(1274년)에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 김방경(金方慶)이 몽고군사와 함께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 이곳에서 제방을 고쳐 쌓고 군량미를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도 국가가 관리하는 국영농정(國農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신수리시설(新水利施設)을 하기전까지는 비교적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수산제가 일본인들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어 버렸는데, 최근들어 밀양시 당국에서 발굴 조사작업을 거쳐 옛제방(守山堤)의 일부를 복원하고, 전시관, 수구보호각, 미니저수지, 경작체험답, 야외전시시설, 야외공연장, 주차장, 휴게실, 화장실, 안내판 등을 설치하여 학습장으로 활용코져 열심히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6
성화십칠년왕녀태실(成化十七年王女胎室)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산13
문의처
밀양시
소개
성화(成化) 17년(1481년) 왕녀태실(王女胎室)은 조선 성종 왕녀의 태(胎)를 봉안한 것으로 화봉리 태봉산(胎封山) 정상부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이곳에는 원형의 석물과 태실앞에 세운 조그만 표석만 남아있다. 왕녀태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 태항아리(태항 : 胎缸)는 없어지고 태항아리 위에 덮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개석(蓋石)은 주민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져 화봉마을의 민가 담장속 석재(石材)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두 개의 표석에는 전면에『왕녀태실(王女胎室)』, 후면에『성화십칠년시월십일(成化十七年十月十日)』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어 이로 미루어 성종 12년(1481년)에 당시 임금인 성종 왕녀의 태(胎)를 이곳에 봉안하였음을 알수 있다. 또한『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조산야리 재부서이십리 당성공주태 출김선생필재집(助山也里 在府西二十里 唐成公主胎 出金先生畢齋集)』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산야리(助山也里)는 지금의 화봉(華封)이고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사이에는 신숙공주(愼淑公主)밖에 없기 때문에 밀주구지의 당성공주는 신숙공주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많다. 표석의 크기는 오른쪽의 것은 높이 115cm,폭 36cm, 두께 20cm이고, 왼쪽은 높이 115cm, 폭 38cm, 두께 23cm 정도이다. 또한 마을에 있는 개석(蓋石)의 크기는 높이 120cm정도, 내부크기는 50cm 정도이다.
7
선략장군손유호묘(宣略將軍孫攸好 墓)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272-1
문의처
밀양손씨종친회
소개
손유호는 밀양 손씨(密陽 孫氏)로 휘(諱)가 유호(攸號)이며 자(字)는 일덕(一德)이다. 부는 지울주사(知蔚州事)를 지낸 휘(諱)가 복경(卜經)이요, 처는 박씨(朴氏)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1410년에 선략장군으로 기장(機長) 두모포(豆毛浦) 수군진영을 방어 하다가 1419년(己亥)에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이 전함 227척과 1만7천명의 조선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 원정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해 6월 20일 거제도의 견내량을 떠난 조선 수군은 해류를 타고 단 하루 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도착했는데, 왜구에게는 천혜의 요새였던 아소우(淺茅) 만을 점령한 조선군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듣지 않았다. 상륙작전을 감행한 조선군은 적선 129척과 가옥 2000여 채를 불태우고 왜구 120여 명을 죽인 뒤,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대승을 거두고 한 달여 만에 철수하였다. 귀향한 이후에도 공은 효(孝)로서 부모를 섬기고 믿음으로서 친구를 사귀었으므로 종족들이 그의 효성과 우애를 칭송하고 마을 사람들이 그의 신의에 탄복하였다. 세종 30년(1448) 6월 24일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77세였다. 그해 9월에 초동면 양곡리(陽谷里) 북쪽산 남향 언덕에 있는 고조(高祖) 밀성군(密城君)의 선영 아래에 묘를 섰고, 세종 32년(1450)에 조산대부 성균관사예 단양인 박욱(朝散大夫 成均館司藝 丹陽人 朴彧)이 비를 세웠다
8
사명대사생가지(四溟大師生家址)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사명대사생가로 642
문의처
밀양시
소개
임진왜란 때 의승장(義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는 중종 39년(1544년)밀양시 무안면 고라리(古羅里) 풍천(豊川) 임씨(任氏)집안에서 아버지 교생(校生) 수성(守成)과 어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낙원정(掌樂院正)이 되어 대구(大邱)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밀양에서 살았는데, 사명당의 조부는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유학(幼學)종원(宗元)이다. 이름은 유정(惟政) 또는 응규(應奎)라 하였고 호는 종봉(鐘峰), 송운(松雲), 사명(四溟)이다. 13세 때인 명종 11년(1556년)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우다 "세속(世俗) 학문은 천하고 비루(鄙陋)하여 시끄러운 세상 인연에 얽매여 있으니 어찌 번뇌없는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인가?" 하고 그 해 가을 황악산(黃嶽山) 직지사(直指寺)로 가서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머리를 깍고 선문(禪門)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명당(四溟堂)이 출가(出家)하기전에 살던 고향집은 이전가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가 지형상 399번지가 이곳을 축으로 하여 뒷산의 주맥이 흘러 내려오고 있는 지점이라 증조부 임효곤이 풍수지리상 명당터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현장의 유구를 조사한 결과 기와파편, 생활용품파편 등이 발견되고 건물물의 유구로 보이는 담장의 흔적들도 발견되어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로 결정하고 밀양시에서 생가지 정비작업을 시행(부지매입 및 기반조성, 생가지정비, 기념비건립)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밀양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호국사명사대의 유적지를 성역화(임란전적기념관건립, 생가지보완)하여 구국정신을 선양하고 영남루, 표충사, 얼음골 등 불교사찰 및 유적지와 연계한 관광 벨트화를 기하기 위하여 간단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9
밀양적룡지(密陽赤龍池)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연상1길 31
문의처
박병륜
소개
적룡지(赤龍池)는 조선초기 장수로서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판서(禮曹判書) 및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박곤(朴坤)장군이 무예를 닦던 어변당(魚變堂)앞에 있는 연못이다. 박곤이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하여 뜰에 연못을 파고 조석(朝夕)으로 물고기에게 밥을 넣어주며 지성으로 길러서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는데, 어느날 이에 감읍(感泣)한 물고기 한 마리가 붉은 비늘(赤鱗)을 남기고 용(龍)이 되어 승천하는 이변(異變)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은 그 때부터 이 연못을 "적룡지(赤龍池)"라 부르고, 건물을 어변당(魚變堂)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박곤은 이 일을 계기로 3차례나 무과(武科)에 자원급제하고 변방의 왜구를 정벌하였는데 고기가 등천(登天)할 때 남긴 두장의 붉은비늘(赤鱗)로 말안장을 장식했더니 말이 용(龍)과 같이 빨랐다고 하며 왜적들이 "비룡장군(飛龍將軍)"이라고 부르며 벌벌 떨었다고 전한다.
10
밀양읍성(密陽邑城)
분류
문화유산
위치(주소)
밀양시 내일동 36-1, 35-10, 318-2, 318-4
문의처
밀양시
소개
밀양읍성(密陽邑城)은 성종 10년(1479)에 처음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읍성석축사천육백칠십척고구척내유사정일지성화십오년축(邑城石築四千六百七十尺高九尺內有四井一池成化十五年築)"이란 기록으로 보아 "돌로 쌓은 읍성의 둘레가 4,670척, 성벽의 높이가 9척, 성 안에는 우물 네 곳과 연못이 하나 있으며 성화 15년(1479)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밀양시 내일동 전역을 포괄하며 쌓았던 밀양읍성은 동북으로 무봉산(舞鳳山: 일명 衙東山)과 아북산(衙北山) 능선을 따라 북성걸에 이어졌다. 서쪽은 해자(垓字) 천(川)인 해천을 따라 남북 일직선으로 성벽이 구축되어 누교(樓橋)에 연결되었고, 거기서 동쪽으로 남천강변을 따라 영남루(嶺南樓) 아래까지 성을 쌓았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 의하면 사방에 성문을 냈는데, 성문의 규모는 동문 1칸, 서문 1칸, 남문(읍성의 정문으로 拱海樓라고 함) 중층 3칸, 북문 1칸이었다. 동서로 야문(夜門)을 설치하여 성중(城中)에서 사람이 죽어 초상(初喪)이 나면 그 시신이나 상여가 모두 야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때 왜군의 공격을 받아 읍성 원래의 제도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폐허(廢墟)가 되었으며, 선조 39년(1606)경부터 읍성을 재건해 나갔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복구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의 제도와 규모는 많이 변경되었고, 구한말에 이르러 읍성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져 석축이 무너지고 사대문(四大門)의 기능 또한 상실되어 고종 39년(1902) 밀양을 통과하는 경부선 철도 부설시 사대문과 성벽을 헐고 그 성돌을 철로공사(鐵路工事)에 이용했다. 이로써 밀양읍성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으며, 최근 밀양시에서 영남루 앞 남천강변에서 동문고개까지 읍성의 성벽 일부를 복원하였다
1
2
1
2
만족도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매우 만족
(5점)
만족
(4점)
보통
(3점)
불만족
(2점)
매우 불만족
(1점)
의견:
등록
담당자 :
문화예술과
전화 :
055-359-5641
이전배너보기
다음배너보기
배너일시정지
밀양시청
문화체육관광부
경남관광 길잡이
한국도로공사
물사랑 홈페이지
대한민국 구석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