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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송계 신계성 여표비(松溪 申季誠 閭表碑)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72
문의처
평산신씨사부공파종중
소개
여표(閭表碑)비란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으로 평산신씨 사부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이 여표비는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1499~1562) 별세후 1576년에 밀양부사 약봉 김극일(藥峰 金克一)이 송계의 도덕과 행의(行義)를 현창(顯彰)하고자 하는 사림(士林)의 청에 의하여 글을 짓고, 향인 박도생(朴道生)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비석을 세우고 비각(碑閣)을 지은 것이다. 송계 신계성은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문인이며,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절친하였는데, 남명과 함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점필재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람으로써 자연히 사림파의 학문자세를 지닌 독행군자(篤行君子)가 되었다.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병향되고,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에도 제향되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백의(白衣)로서 사액서원(賜額書院)에 모셔진 것은 이례적이며, 여표비 역시 유허비나 유사하나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종류의 비석이다. 1576년에 세운 비와 비각이 임진왜란때 비석과 비각이 파괴되어 1634년에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지문(識文)을 받아 중건하였다. 이때 비문의 글씨는 창원부사 오여벌(吳汝橃)이 썼고, 두전(頭篆)은 사간(司諫) 김세렴(金世濂)이 썼다. 1756년 화재로 비각이 다시 소실되면서 비석도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1765년에 밀양부사 김인대(金仁大)가 향중 사림과 협의하여 비각과 비석을 중건하였다. 이때 비문의 글씨는 예조판서 윤급(尹汲)이 지문(識文)을 지어서 썼고. 두전(頭篆)은 지수재 유척기(知守梓 兪拓基)가 썼다. 이 비는 비신에 이수와 대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비신은 사암으로 제작하였다. 비의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187cm 규모이다. 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단층 목조 맞배지붕 형식이며,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밀양부사를 지낸 김극일(金克一)이 지었다.
42
밀양 청운리 안세환 가옥(密陽 靑雲里 安世煥 家屋)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부북면 청운2길 20-11
문의처
안세환
소개
호재 안종익이 1935년에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에 건축한 근대기 주택이다. 청운리는 광주안씨가 대대로 집단 세거하는 마을로, 인접하여 안종익의 형 훈재 안종문이 지은 밀양 청운리 안씨 가옥(경남 문화재자료 113호)이 위치하고 있다. 이 주택은 1932년에 착공하여 1935년에 완공한 것으로 동서로 긴 장방형의 대지에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채, 행랑채 등 5동으로 축조되었으나 행랑채는 소실(燒失)되고, 4채가 현존한다. 매일 20~30여명의 과객(過客)을 모시기 위해서 작은 아들의 집이지만 상당한 비용을 들여 건축하였다고 전해온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 곳간채 등이 긴 직사각형의 대지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좌우로 평행하게 놓여 있는데, 일자형(一字型)의 안채 서쪽에 ㄱ자형 사랑채가 있고 동쪽에 곳간채가 있으며 남쪽에 대문채를 두었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사랑채 앞면 모퉁이에는 외부인들이 출입할 문을 따로 달아 남녀가 출입하는 곳을 구분해 놓았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샛담을 쌓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건축 당시의 남녀 구별이 훨씬 유연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전·후퇴가 발달하였다. 왼쪽부터 정지, 큰방, 대청, 작은방 순으로 배치되었고 정지 뒤쪽에는 1칸 크기의 정지방이 있다. 안채 대청은 2칸이며, 뒤쪽과 옆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작은방 앞에는 바닥이 높은 툇마루가 있고, 그 아래에는 함실아궁이가 있다. 또한 안채는 배면과 측면에 쪽마루가 길게 부착되어 있어 공간의 연결성과 실용성이 돋보였으며, 부엌과 다락을 통해 설치된 배기시설은 당시에는 흔치않은 형태이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4칸이며 왼쪽부터 큰사랑마루, 큰사랑방, 사랑부엌이 있고 사랑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어 작은사랑방과 작은사랑마루를 배치하였다. 사랑채 뒷마당에 맞닿은 토담에는 작은 협문을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다. 곳간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의 팔작지붕 집이며 외벽에 판벽과 판문을 두었다. 앞면 맨 오른쪽 한 칸은 방앗간 구실을 하며 디딜방아가 남아 있고, 나머지 2칸은 농업용과 생활용의 창고이다. 곳간채와 안채 사이에 장독대가 있다. 곳간채에 남아 있는 상량문에 <을해사월십삼일인시상량(乙亥四月十三日寅時上樑)>라 한 것과 지붕 망와에 <퇴로공장 귀 을해년(退老工場 貴 乙亥年)>이라 한 것을 볼 때 1935년에 건축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근대 씨족마을의 주거생활과 주택형식을 잘 보여주는 경남지역의 특징적 근대한옥이다
43
조광익 효자정려각(曺光益 孝子旌閭閣)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63
문의처
창녕조씨 오봉제종회
소개
이 정려각은 효자 취원당 조광익(聚遠堂 曺光益:1537~1578)의 크나큰 효(孝)를 표창하라는 왕명으로 세워진 “효자 조봉대부 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려(孝子 朝奉大夫 刑曹正郞 兼 春秋館 記主官 曺光益 閭)”이다. 조광익의 태생지는 창원시 지개동(芝介洞)으로 그곳에 세워진 정문(旌門)을 임진왜란 후인 1634년 초동면 오방동에 여각(閭閣)을 짓고 옮겨왔다. 그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도가 되어 경학(經學)을 익혔으며, 156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7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하여 형조정랑에 올랐다. 친상(親喪)을 당해 상례(喪禮)가 어김이 없었고, 어머니에 대한 효가 지극하여 향리는 물론 밀양, 창원, 영천의 사림(士林)이 감복하니 순찰사(巡察使)가 공의 효행을 글로 써서 왕에게 올렸다. 1572년 동짓달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므로 한강 정구(寒岡 鄭逑), 율곡 이이(栗谷 李珥) 등 재현들이 글로서 타이르기도 했고, 선생이 38세 되던 해에 도내 사림들이 그의 효행을 적어 조정(朝廷)에 올렸다. 3년간의 여묘살이를 끝내고는 평안도부사(平安道府使)를 자청하여 강동(江東)에 적거(謫居)중인 동생 호익(好益)과 만나 형제간의 정회(情懷)를 풀다가 임지(任地)에서 병으로 죽었다. 선조임금이 부음을 듣고 교서를 내려 “조광익의 효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예(禮)로써 다하였으니 이들이 모두 감복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봉양, 수상, 려묘)에 기록하고 정려(旌閭)로서 표창하라” 하였다.
44
경덕단(景德壇)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 17
문의처
밀성박씨 정국군파
소개
경덕단은 밀성박씨(密城朴氏)의 상조(上祖)인 밀성대군 박언침(密城大君 朴彦忱)과 아들 박욱(朴郁), 손자 박란(朴瀾) 등 3세조(三世祖)의 단비(壇碑)를 모신 단소(壇所)이다. 이들의 묘(墓)가 전해오지 않자 정국군 박위(靖國君 朴威) 장군의 16대 손인 창번공 시독 박해철(滄樊公 侍讀 朴海徹:1868~1934)이 종지(宗旨)를 모아 1925년 11월부터 1927년 12월까지 2년여 공사 끝에 준공되었다. 밀성대군 박언침은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여덟 왕자 중 장자(長子)이며 스스로 왕통 계승을 불사(不嗣)하자 밀성대군에 봉해졌다. 박욱은 장남인 박란과 함께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는데 크게 공훈을 세워 진무공신(鎭撫功臣)인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이 되었고, 박란은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가 되었다. 경덕단은 넓은 대지(1,617㎡)의 정면 중앙부에 3기의 비석과 床石으로 제단을 만들고, 그 남쪽에 외삼문(9×1칸) 1동을 건축했다. 그 주위에는 방형의 토담을 쌓아 영역을 한정했으며, 외삼문은 경덕단내 유일한 한식 목조건물이다. 제단의 비석은 상조인 밀성대군 박언침을 중앙 수좌(中央首座)에, 삼한벽공도대장군 박욱을 동단(東壇)에, 요동독포사 박란을 서단(西壇)에 각각 배치했다. 단비(壇碑)의 비문은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이며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알려졌던 위창 오세창(葦昌 吳世昌)선생이 전서(篆書)했다. 제단 남쪽에 배치된 외삼문은 정면 9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집으로, 중앙부 3칸의 지붕을 한단 높게 처리한 소슬삼문이다. 외삼문의 정면의 긴 벽은 벽돌을 치장쌓기하여 폐쇄하고, 안쪽은 의례공간인 마당과 제단을 향해 벽체를 개방하여 제의시(祭儀時)의 준비공간으로 헌관(獻官)과 집사자(執事者)를 비롯한 참제인(參祭人)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외삼문은 삼문으로서의 기본적 기능외에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및 회랑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게 내부공간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제단 뒤로는 높이 1.8m의 벽돌 벽을 ‘ㄷ자형’으로 쌓아 제단 주위의 제의공간을 일정하게 한정함과 아울러 시각적 초점이 되도록 했다. 단비를 감싸고 있는 벽면에는 당시 중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알려진 화려한 모양의 타일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고, 부속건물인 삼문의 내벽에는 매화, 송학, 난 등의 벽화가 남아있어 건립 당시 화려하고 웅장했던 단소(壇所)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경덕단에서는 매년 음력 9월 9일부터 10일까지 양일간에 걸쳐 경향 각지에서 모인 종원(鐘員)들이 주축이 되어 단향(壇香)을 봉행하고 있다.
45
용안서원(龍安書院)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무안면 내진1길 39-18
문의처
벽진이씨여은공종중
소개
용안서원(龍安書院)은 무안면 내진리에 세거하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선현 4위(先賢 四位)를 봉안하는 서원으로 벽진이씨 여은공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조선 순조 13년(1813)에 別舍를 창건하여 문안공 山花 李堅幹과 星山君 李軾을 봉안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818년에 장소와 건물이 협소하여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고 용안사(龍安祠)라 하였다. 1870년에 훼철된 후 龍安齋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22년부터 설단하여 여은(麗隱) 이사지(李思之)와 대호군(大護君) 이중림(李仲林)을 추가로 봉안하고 향사하였다. 1983년에 용안사 옛터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재사(齋舍)를 중수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매년 9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용안서원은 강당과 시습재 및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소로수장집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이며 외진주에 도리방향으로 첨차를 두어 소로로 받친 다소 특이한 소로수장집이다. 대량과 외진주는 보아지로 받치고, 다시 첨차를 두어 결구하였으며, 그 상부에 장혀를 놓고 주심도리를 결구하였다. 종보는 대량에 3분 변작의 위치에 두었고 종도리는 종보위에 제형 판대공으로 받쳤다. 대청은 3칸으로 매우 넓고 좌우에 1칸의 방을 두었으며 방의 앞뒤 2칸은 통칸으로, 대량 밑에 문인방이 수평으로 가고 대량 밑에 직접 고주로 받고 있다. 기둥은 강한 민흘림을 보이고 있어 고식의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시습재는 강당 오른편에 직각으로 꺽여 배치되어 있으며, 동재(東齋)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북측 2칸은 방, 남측 2칸은 대청으로 누마루형식이다. 누마루 주위 난간은 평난간이다. 외진주 외부에 툇마루를 덧붙여 강당과 같은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맞배지붕으로 부연없이 홑처마이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입정문은 솟을삼문으로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사당인 용안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익공계 3량가이며, 종보는 측면에 고주를 세워 받고 중앙은 대들보 위에 동자주로 지지하고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고직사는 “ㄱ자집”으로 팔작지붕이다. 조선후기 서원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46
밀양 명례리 명례성당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문의처
마산교구 천주교유지재단
소개
하남 명례는 가톨릭 교회의 순교자 신석복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는 1828년 명례에서 출생하였고(명례리1209번지) 1866년 대구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묘는 진영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가톨릭교회는 신석복을 성인의 반열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 데, 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 가톨릭신자로부터 공경을 받게 된다. 그의 생가가 종교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보존되어야 하는 명례성당은 1887년 명례에 천주교 공소가 설립 되었고 1897년 9월에 천주교 본당으로 승격되었는데 경남의 첫 번째 본당이고 당시 경상남북도를 통틀어 4번째 본당이며, 명례 본당의 관할 구역은 울산을 넘어 경주까지였다. 1898년 1월 명례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의 세 번째 신부이다. 강 신부는 1903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이곳 명례에서 선종 하였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명례의 성전은 1926년에 주임신부로 부임한 권영조(마르코)신부가 1928년에 봉헌한 것이다. “기와로 된 성전”은 불행히도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어, 1938년 전파된 그 자리에 성당을 축소하여 복원하였다. 건물은 초라하지만 성전 내부는 전국에서 몇 개 되지 않는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느끼게 해주는 종교문화사적인 가치를 지닌 곳으로 매일 수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47
박연정(薄淵亭)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상동면 상동로 1034-7
문의처
광주김씨종중
소개
박연정(薄淵亭)은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 : 1555-1620)가 임진왜란을 수습한 다음 충청병사(忠淸兵使)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상동면 고정리 모정(茅亭) 마을에 창견한 별업(別業)이다. 본래 이곳은 명종 때 능성현감(綾城縣監)을 지낸 이 고을 향선생(鄕先生) 이담용(李聃龍)의 별업인 관란정(觀瀾亭)의 옛터였으며 신라 때에는 "지대(支待)"라는 당나라 장수가 (陳)을 치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의 병화(兵禍)로 관란정은 불타버리고 폐허로 방치된 것을 양무공이 발견하여 광해 5년(1613년)에 박연정을 지었다. 그후 사후 40년 만인 헌종 1년(1660년)에 손자인 김부호(金富鎬)가 경내를 확정 정비하여 정당(正堂)과 충의문(忠義門)을 중창하였다. 그러나 헌종 8년(1682년)에 뜻하지 않은 화재를 당하여 180여년 동안 복원을 못하고 있다가 고종 1년(1864년)에 9대손인 영장(營將) 김난규(金蘭奎)가 중건을 하게 되었다. 1938년에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충의문이 중건되었고, 1966년에는 새로이 추유재(追裕齎)를 세웠다. 정자의 북쪽에는 수어대(數漁臺)가 있고 강가의 깍아지른 벼랑 끝에는 빙허대(憑虛臺)가 있으며 빙허대 위에는 만년송(萬年松)이라 일컫는 희귀한 노송도 있어 주위의 수려한 경관과 함께 박연정의 운치(韻致)를 더하고 있다.
48
청운리 안씨고가(靑雲里 安氏古家)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부북면 청운2길 20-9
문의처
안병기
소개
부북면 청운리에 있는 광주안씨(廣州安氏)의 고택(古宅)으로 조선조 말기 경상도지방의 상류가정의 건물이다. 1840년대에 의관(議官) 안붕원(安鵬遠)이 이곳으로 옮겨온 뒤 그의 아들 훈재 안종문(塤齋 安鍾文)과 호재 안종익(箎齋 安鍾翊) 형제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효우(孝友)를 독실히 하고 가정을 일으킨 결과 한때는 3천석의 수곡(收穀)을 받는 큰 지주(地主)가 되었다. 건물의 배치상태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좌우의 별채, 사랑채 그리고 좌측 별채에 연접한 중문채 등으로 口자형을 이루고 있고, 바깥마당에는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에 조산(造山)을 중심으로 정원을 꾸몄으며, 좌우에 있었던 행랑(行廊)과 창고 등의 건물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이 고택은 1870년대 안종문이 정침과 좌우에 별채 2동, 대문 등을 지었고, 1890년경에 그의 아들 안동수(安東洙)가 사랑채, 행랑채, 창고, 바깥대문 등을 중축했다. 정침은 안마당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가운데 2칸의 마루와 좌우 1칸씩의 방이 있고, 동편에 부엌이 딸린 정면 5칸의 팔작집이며 오른쪽에 대청이 있고 왼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화남정사(華南精舍)”라는 당호와 “인지위덕(認之爲德)”이란 편액이 대청 도리에 걸려 있으며 마루 뒤쪽에는 판자벽을 두고, 창문과 툇마루를 두어 내정과 연결 하였다. 정침과 사랑채 전면의 유리를 끼운 격자 여닫이문은 당초의 구조가 아니며 후일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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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이신정려(孝子李申旌閭)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산1
문의처
재령이씨대종회
소개
하남읍 남전리 효자문마을에 있는 이 정려(旌閭)는 계은(溪隱) 이신(李申)의 효행(孝行)을 표창하기 위해서 태종(1401-1418)년간에 왕명으로 세운 것이다. 이신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개성(開城)에서 남하(南下)하여 밀양 조음에 정착한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장남으로 일찍이 부모님께 효도를 다했는데, 부친상(父親喪)을 당해서는 시묘(侍墓)하는 동안에 상복(喪服)을 벗지않고 죽으로 연명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나타내었다. 이신은 공민왕 때 효렴(孝廉)으로 뽑혀 입신한 후 도만호(都萬戶)를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재임할 때 혁명흉도(革命凶徒)들을 제거하고 왕정을 회복시키고자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조준(趙浚), 정도전(定道傳), 남은(南誾) 등의 죄상을 탄핵(彈劾)하다가 그들에게 도리어 박해를 당하여 귀향가는 도중에 장독(杖毒)으로 운명(殞命)하였는데, 그 후 태종 때에 와서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서 효행 정려(孝行 旌閭)가 세워졌으며 이곳 마을 이름도 효자동(孝子洞)으로 일컫게 되었다.
50
표충사 팔상전(表忠寺 八相殿)
분류
문화유적
위치(주소)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문의처
표충사
소개
표충사 팔상전은 철종 5년(1854)에 당시 주지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구지(地藏殿 舊址: 현,종무소 자리)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팔상전은 창건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의 표충사는 헌종 5년(1839) 무안면 영취산(靈鷲山)에 있던 표충사(表忠祠)란 사당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며 당시 영정사(靈井寺)였던 절 이름을 표충사(表忠寺)로 바꾸었고, 당시 사찰 경내의 관음전이었던 곳을 표충서원이라 편액한 뒤 휴정(休靜), 유정(惟政), 영규(靈圭) 3대사의 향사를 받들어 왔다. 전통사찰에서의 팔상전(八相殿)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모습 즉, ①하천(下天), ②탁대(託胎), ③강탄(降誕), ④출가(出家), ⑤강마(降魔), ⑥성도(成道), ⑦전법륜(轉法輪), ⑧입열반(入涅槃) 순으로 나누어 표현한 탱화(幀畵)와 존상(尊像)을 모신 법당을 말한다. 현재의 팔상전은 헌종 5년(1839) 봄에 사명대사의 8세 법손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가 무안면 영취산에 있던 표충사(表忠祠: 서산, 사명, 기허 등 3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를 당시 영정사(靈井寺)였던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절 이름을 표충사(表忠寺)로 바꿀 당시에는 관음전(觀音殿)이었던 곳인데, 이곳에 3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향사를 받들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능 할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대광전(大光澱)과 나란히 불제자의 유상(遺像)을 모신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하여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당초 표충서원이 있던 자리에 팔상전을 옮기고, 본래 팔상전이 있던 자리에는 표충서원을 옮겨 1992년 복원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존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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