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기념물

  • 문화재명밀양읍성(密陽邑城)
  • 분류도지정문화재
  • 지정번호제167호
  • 수량(면적)75,746㎡
  • 소유자밀양시
  • 관리자밀양시
  • 소재지밀양시 내일동 36-1, 35-10, 318-2, 318-4

소개

밀양읍성(密陽邑城)은 성종 10년(1479)에 처음 쌓은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읍성석축사천육백칠십척고구척내유사정일지성화십오년축(邑城石築四千六百七十尺高九尺內有四井一池成化十五年築)"이란 기록으로 보아 "돌로 쌓은 읍성의 둘레가 4,670척, 성벽의 높이가 9척, 성 안에는 우물 네 곳과 연못이 하나 있으며 성화 15년(1479)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밀양시 내일동 전역을 포괄하며 쌓았던 밀양읍성은 동북으로 무봉산(舞鳳山: 일명 衙東山)과 아북산(衙北山) 능선을 따라 북성걸에 이어졌다. 서쪽은 해자(垓字) 천(川)인 해천을 따라 남북 일직선으로 성벽이 구축되어 누교(樓橋)에 연결되었고, 거기서 동쪽으로 남천강변을 따라 영남루(嶺南樓) 아래까지 성을 쌓았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 의하면 사방에 성문을 냈는데, 성문의 규모는 동문 1칸, 서문 1칸, 남문(읍성의 정문으로 拱海樓라고 함) 중층 3칸, 북문 1칸이었다. 동서로 야문(夜門)을 설치하여 성중(城中)에서 사람이 죽어 초상(初喪)이 나면 그 시신이나 상여가 모두 야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때 왜군의 공격을 받아 읍성 원래의 제도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폐허(廢墟)가 되었으며, 선조 39년(1606)경부터 읍성을 재건해 나갔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복구하는 과정에서 초창기의 제도와 규모는 많이 변경되었고, 구한말에 이르러 읍성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져 석축이 무너지고 사대문(四大門)의 기능 또한 상실되어 고종 39년(1902) 밀양을 통과하는 경부선 철도 부설시 사대문과 성벽을 헐고 그 성돌을 철로공사(鐵路工事)에 이용했다. 이로써 밀양읍성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으며, 최근 밀양시에서 영남루 앞 남천강변에서 동문고개까지 읍성의 성벽 일부를 복원하였다

블로그 후기

만족도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 담당자 : 문화예술과 전화 : 055-359-5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