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전시실
 ㅇ 2층 관람관




의열단 초기활동현장(상하이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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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의열단 초기활동현장(상하이전경)
- 1919년 11월 의열단 초기활동 현장!



반씨주택 내부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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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씨 주택
의열단이 창립된 곳인 중국인 반씨의 집은 길림성 파호문 밖에 있었으며, "화성여관"(華盛旅館)"이라는 옥호(屋號)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의열단 창립단원 소개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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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립단원 소개코너
의열단 창립의 주역들을 소개하는 공간


의열단 창립단원 소개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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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창립단원 소개코너
의열단 창립의 주역들을 소개하는 공간


창단 이후의 의열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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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이후의 의열단원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이 창단된 이후 의열단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 소개


최수봉과 나석주 의사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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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두 발의 폭탄을 던져 타격한 최수봉 의거는 영남 일대의 항일 민심을

격동시켰고 전투적 독립운동 진영을 다시금 고무시켜주었다. 박재혁 의거에 뒤이은 성공적인 의거로 의열단과 김원봉은

제1차 국내 대의거 기획의 실패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고, 그것은 이듬해 9월의 김익상 의거로도 입증되었다.
나석주 의사의 서울 의거
마중덕(馬中德)이라는 이름의 중국인으로 위장하고 1926년 12월 27일 서울로 잠입한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가 ‘경북의열단사건’

의 결심공판일이던 12월 28일, 서울 남대문 부근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으로만들었다.

이 의거는 김익상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파의거(1921. 9) 이후 민족혼을 일깨운 거사이며, 유림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주도하에

류자명․신채호․한봉근의 도움과 천진에서 중국군 장교로 복무 중인 제자 나석주와 의열단원 이승춘 등을 소개해준 김구의

조력 등이 그 바탕이 되었다.

나석주 의사의 투탄 의거는 의열단과 유림독립운동 계열 및 임시정부 계열 운동자들 사이의 신뢰와 친분이라는 합작을 통해

이루어진 연합의열투쟁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재중국 독립운동진영의 통합과 단결을 고무하고 촉진시킨 것에

큰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의열단의 투탄의거와 의미
거사용 권총과 폭탄을 초기에는 주로 상하이에서 중국인 등에게서 구입해 썼으나, 1923년에는 비밀 폭탄제조소를 설치해놓고

헝가리인 마자르 등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고성능 폭탄을 만들어 섰다.

폭탄은 투척용(수류탄)과 도화선형이 주로 제작, 동원되었다. 폭탄재료 구입비와 활동비 등의 자금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원에 의해 조달한 사례가 획인되나, 그 이상의 자금원은 불확실하다.

국내 부호의 집으로 찾아가 기부를 요구한 적도 있으나, 징수 실적은 기대에 못 미치고 저조했다. 그러나 갈수록 자금난에

부딪쳐 거사계획을 포기하거나 규모를 줄여야 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1920년 3월 ~ 6월: 제1차 국내 대의거 추진의 의의

비록 실패했지만 이 거사기획은 의열단 창단 후 최초로 시도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규모가 크고 대담하였다.

그래서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독립운동의 전투성을 아주 드높이는 효과를

내면서 유사한 거사 기도를 이끄는 의열투쟁 사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최수봉 의사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웹툰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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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사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웹툰영상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 최수봉 의사가 일제의 압제기관인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웹툰 영상으로 소개




의열단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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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에 부는 변화의 바람
1923년 1월 김원봉은 류자명의 소개로 단재 신채호에게 의뢰하여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 받고 의열단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선언문은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널리 배포되고 일본에까지 배송 살포되기도 하였다. 선언문의 발표로 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은크게 앙양되고, ‘우리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고 자초하게도 되었다. 그 후로 의열단은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 일본 ․ 국내등 각처에 하부기관을 설치하여 지역 거점을 확보하면서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1923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방면, 일본의 도쿄 ․ 고베 ․ 오사카 ․ 요코하마 등지로 단원을 파견하여 활동구역으로 삼았다.

중국도 관내(關內) 지역으로 국한되지 않고, 만주는 물론 대만 ․ 몽고로까지 활동권이 확대되었다. 또한 의열단이 고강도의

암살파괴운동으로 이름을 떨치니 독립운동 진영의 여러 계열 ․ 세력에서 그 명성과 실행력을 탐내어 제휴 상대로 삼거나

포섭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1922년 경부터 단원 수가 급증하여, 1923년에는 최소한 150명 내외의 규모에 달했다. 조직성격도

민족주의 ․ 아나키즘 ․ 사회주의 각 계열 운동자를 두루 포용하는 자유연합 결사처럼 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직세의 확대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낳았다. 늘어난 단원들 간에 이념노선과 활동방략에 관한 견해차가

나타나 보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노선분기와 조직균열 현상이 초래되기도 한 것이다. 1923년 여름에 고려공산당 산하의

실행조직인 적기단과의 합작 문제를 놓고서 노출된 의견대립도 그 한 사례이었다.
군사 ․ 정치운동으로의 노선 전환과 조직변동
단내 분열이 조금씩 감지되던 상황에서 윤자영을 비롯한 고려공산당원들이 입단 후 얼마 안 가 의열단을 탈퇴하고상하이에서

‘청년동맹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는 의열단의 운동노선을 ‘공포론’(테러리즘)으로 폄하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 인한

청년동맹회와의 갈등 속에서 의열단은 감정적 반응을 앞세우다 노선 공방전에서는 사실상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의열단 내에서도 합법적 대중운동과 그 사상적 배경인 사회주의로 경도되는 단원이 늘어갔다.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고 그 만큼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김원봉 등 의열단 간부진도 기왕의

의열투쟁 노선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단순 폭력투쟁이 아닌 제도변화와 독립전쟁으로 나아갈 혁명적

무장투쟁을 위해 민중을 각오 ․ 단결시킬 교육과 의식화 방면으로 관심이 돌려지게 되었다. 또 다른 상황은 재정궁핍이

극심해져 갔다는 것이다.

일제 당국조차도 의열단은 “다른 운동단체들과는 달리 인민의 금전을 강취한 사실이 없고 추호도 인민에게 미혹을 끼친

사실이 없다”고 하였으나, 1925년 이후로는 불미스런 사건의 발생 사례가 보고되었음에서 의열단의 재정난이 심각해졌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의열단은 광저우로 본부를 옮기고 단원 다수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군사 ․ 정치

부문의 인재를 양성하는 쪽으로 활동방향을 바꾸어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 조직화를 기하기 위한 정치운동과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개시할 수 있을 군사운동의 기반을 조성해가려 한 것이다. 그것이 1929년 베이징에서의 ‘레닌주의정치학교’ 설립,

1932년 난징에서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3기 운영에 의해 125명 졸업) 등의 성과를 낳았으며, 1935년 국외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신당인 ‘민족혁명당’이 창립될 때 참여하면서 의열단은 자진해체하였다. 그래도 의열단계의 조직

명맥은 당내에서 계속 유지되었고, 마침내 중일전쟁 발발 후인1938년 10월에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될 때 당당히 그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탄생과 박차정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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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의 탄생 배경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개전 이후 그해 7월말에 북경과 천진, 11월에 상해, 12월에는 당시 수도였던 남경마저

함락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일제는 1938년 8월 하순부터 일본군의 중지나파견군이 9개 사단 30여만 병력으로

무한(武漢)공략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무한 점령 공방전 속에 탄생된 것이 조선의용대 이다.

항일독립운동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한인 최초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의열단계열이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일관되게 추구해갔던 무장투쟁노선과 그에 입각한 군대 창건의 준비, 아울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인재육성과

실력양성 활동 등 의열단을 중심으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벌여온 항일무력 건립운동 및 통일전선 결성운동의 주체적

노력과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객관적 정세변화가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륙의 불꽃 박차정 의사 (1910년 5월 8일 ~ 1944년 5월 27일)
박차정 의사는 경남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417번지(현재 칠산동 319-1)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연의

3남(문희 문호 문하) 2녀(수정 차정)중 넷째로 태어났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한 선생은 1929년 12월 근우회 활동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되어 일경의 극심한 취조를 받던 중 건강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병보석을 신청하여 1930년 2월 15일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의열단원인 오빠 박문호가 보낸 밀사를 통하여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고,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이 결혼은 14년간의 결혼생활에도 자녀가 없었음을 볼 때 남녀의 일반적인 결합이 아닌

항일독립투사로서의 동지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1932년 10월, 중국 남경에서 남편 김원봉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과 제1기 여자교관으로

활약하였으며,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1936. 7. 16)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약하는 등 여성전사로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다 1939년 2월

오른쪽 가슴에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광복을 1년여 앞두고 1944년 5월 27일 사랑하는 남편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1945년 12월 2일, 김원봉이 귀국 할 때 선생의 유해를 모셔와 고향 뒷산인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김원봉의 아내로서 여성 독립투사로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던 박차정 의사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차정 의사
김원봉과 박차정의 결혼사진
박차정 의사
박차정 의사 묘소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아내의 유해를 운구하는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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