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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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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의 성지 밀양!



      독립운동이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민족적 노력이며 한국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의 회복, 즉 일제의 식민통치 권력과 구조를 완전히 파괴 ․ 청산하고,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최종목표인 것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자신의 재산은 물론 목숨마저 담보한 채 일제 강도와 처절한 투쟁을 하여, 1945년 8월 15일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따라서 선열들의 목숨 값으로 해방된 세상에 살게 된 우리들이 그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 후손에 대해 예우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 것입니다. 이에 밀양시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선열들을 추모하고 민족의식 및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2008년 6월 20일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기념관의 이름으로 전국에서 세 번째 세워진 이곳은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활동을 작지만 알차게 전시하여 민족혼을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분들이 남겨준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소중한 자산에 부끄럽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충절의 성지에서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영남유학의 종조라 일컬어지는 점필재 김종직의 절의정신과 나라의 명운이 위험에 처하자 승려의 신분으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는 밀양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 불려왔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개창학교, 화산의숙, 동화학교, 집성학교, 동진학원, 정진학교 등 밀양지역 사립학교는 국권회복을 위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당시 영남지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개창학교는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는데, 1919년 3월 13일 영남지방에서 큰 규모로는 최초로 일어난 “밀양장날 만세운동”을 이끈 윤세주가 졸업한 곳이며, 1919년 4월 2일 일어난 “밀양소년단 만세운동”도 이 학교 출신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1890년대에 설립된 화산의숙이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로 폐교되었다 1921년 3월 25일 사립 정진의숙으로 개교되어 화산의숙의 정신(명윤정덕 明倫正德 이용후생 利用厚生) 계승 및 우리역사와 지리ㆍ애국노래를 가르치며 애국애족의식 배양에 앞장섰다. 또한 조선시대부터 존속했던 밀양의 향교를 근대식으로 개편하면서 신(新)ㆍ구(舊)의 학문을 집대성 한다는 취지로 1920년 3월 유림들이 향교내에 설립한 집성학교는 1906년 설립되었다가 1910년 국권피탈 후 폐교되었던 진성학교의 후신이며, 전홍표 ․ 황상규 등의 지도하에 김원봉, 최수봉, 김상윤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동화학교와 동진 이진화가 1910년 이후에 자신의 호를 따 설립한 동진학원은 밀양지역의 문명개화를 선도하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부북면 춘화리 김씨 집성촌에 정확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지만 1910년대에 사립 계성학교가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학교의 민족의식 고취 교육은 1919년 4월 6일 춘화리 만세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밀양지역의 사립학교가 전무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사립학교가 만세시위운동의 중심지가 되면서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족교육의 바탕위에 형성된 밀양인들의 항일투쟁은 일제 침략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의열단장 ․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원봉, 신간회 중앙집행 위원 황상규, 조선민족혁명당 및 조선의용대의 이론가 윤세주,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 등, 이들의 면모만을 보아도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밀양인들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밀양인들이 남긴 발자국은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의 발전과정을 알려주는 동시에, 밀양이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 추모의공간
    추모의공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윈스턴 처칠), 단제 신채호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 장소인 아우슈비츠에 쓰인 경고문을 아시나요?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류가 그것을 잊는다는 것디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말이지만, 알지 못해 잊을 것조차 없는 우리민족에게는 이 말마저도 부끄러운 말입니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 선열의 불꽃 및 흉상
    선열의 불꽃 및 흉상

    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입니다. 흉상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 네 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 전시공간 1 삼천리 강산을 뒤덮은 태극기
    전시공간1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만세운동은 신분, 지역,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여 연대감과 동질성이 확보되어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확산시켰고, 근대민족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100년 역사를 볼 때 3 ․ 1운동만큼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전 민족이 동참한 사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밀양에서도 3월 13일 밀양면 장날만세운동을 필두로 8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을강 전홍표 선생의 지도와 윤치형 · 윤세주의 주동으로 시작된 만세운동은 밀양공립보통학교학생들의 만세운동(3월 14일), 유림의 만세운동(3월 15일), 안희원 장례행렬 만세운동 (3월 20일), 밀양소년단 만세운동(4월 2일), 단장 장날의 만세운동(4월 4일 ),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4월 6일), 청도면 인산리 만세운동(4월 1 0일) 등에서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사람은 28분이다. 특히, 밀양만세운동은 종교와 이념을 초월한 연대를 보여준 대표적 만세의거로 통일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 전시공간 2 살신성인으로 찾아가는 독립과 해방의 길
    전시공간2

    1919년 11월 10일, 길림성 파호문 밖 평화로 57번지 반씨농가에서 결성된 의열단.
    의열단은 외교론 보다는 무장투쟁노선에 의거한 독립투쟁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조선독립군정사 재정책임자 백민 황상규가 군대 조직과 운용에 소요될 인적 자원의 미비 및 현실적 난관 타개를 위해 소수정예의 결사대적 조직으로 운용될 행동대의 창설을 추진, 조카인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단한 것이다.

    의열단의 주요 활동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1920. 3 ~ 6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 의거(밀양폭탄사건, 진영사건)
    • 1920. 9. 14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 1920. 12. 27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 1921. 9. 12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
    • 1922. 3. 28 상해 황포탄 의거
    • 1923. 1. 22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 1923. 3. 의열단 제2차 암살․파괴 의거
    • 1924. 1. 5 도쿄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
    • 1926. 12. 28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습격 의거

    의열단과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

    1922년 3월 28일 상해 황포탄에서 간도참변(경신참변)을 기획했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 의거 당시 외국인 여성의 죽음으로 의열단은 테러단체로 비난 받고 있었다. 이에 김원봉은 의열단이 결코 테러단체가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단재 신채호에게 부탁하여 1923년 1월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은 기본적으로 운동 이념으로는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운동 방략으로는 신채호 자신이 ‘강도 일본’에 대한 ‘직접 혁명’이라고 명명한 바의 폭력혁명 노선을 제창하고 옹호하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민족혁명 선언이요 민중혁명 선언의 효시라 할 만했던 이 선언문은 의열단의 의열 투쟁 노선에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고 그 운동 방법을 정당화해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왕의 의열단식의 암살 ․ 파괴 행동에서와 같은 소그룹 단위의 폭력이 민중과 결합하여 거대한 민중적 폭력으로 발전되어가야 할 과제를 제기해주고 있기도 하였다. 어떻든 의열단은 이 선언문을 자기의 이름으로 발표함에 의해 기세를 높이고, 이를 즐겨 원용하면서 민족혁명의 행동 주체 즉 혁명단체라는 강렬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 전시공간 3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향하여
    전시공간3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을 계기로, 한인독립운동진영은 통합과 단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중국민 항일독립운동세력과의 국제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가을이래 의열단은 중국국민당정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 저장성(浙江省)일대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운영하여, 125명의 ‘청년투사’를 길러냈다. 김원봉이 교장이었고, 윤세주는 1기생으로 졸업한 다음 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학교 졸업생으로는 이육사(1기), 정율성(2기)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 내 모든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위한 노력 끝에 중국 내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인 민족혁명당이 창당(총서기 김원봉, 중앙상임위원회 서기부 윤세주)되었다. 김원봉과 윤세주가 이끄는 민족혁명당은 일제 말기 중국관내지역 한인독립운동을 주도한 핵심적인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 전시공간 4 중국항일전쟁의 최전선에 서서
    전시공간4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개전 이후 그해 7월말에 북경과 천진, 11월에 상해, 12월에는 당시 수도였던 남경마저 함락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일제는 1938년 8월 하순부터 일본군의 중지나파견군(中支那派遣軍)이 9개 사단 30여만 병력으로 무한(武漢)공략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무한 점령 공방전 속에 탄생된 것이 조선의용대 이다. 항일독립운동 당시 중국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한인 최초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의열단계열이 1920년대 중반 이후로 일관되게 추구해갔던 무장투쟁노선과 그에 입각한 군대 창건의 준비, 아울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이 그 기반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의열단을 중심으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 벌여온 항일무력 건립운동 및 통일전선 결성운동의 주체적 노력과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객관적 정세변화가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구대(박효삼), 2구대(이익성)와 본부대(총대장 김원봉)로 구성된 이 부대는 1939년 그 규모가 커지면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지대로 개편되었다. 크고 작은 전투와 대적심리전에 주력하던 중 1941년 1월, 많은 대원들이 태항산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일본군과 직접 전투하였다. 1942년 일본군의 대규모 소탕전에 대응하여 '반소탕전'을 전개하던 중 석정 윤세주 열사가 피탄되어 순국하였다. 남아 있던 약산과 일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고, 약산은 제1지대장, 부사령을 거쳐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에서 한인군사조직에 의한 항일무장부대의 단초였으며, 군사상의 한중연합전선 구축의 토대였다. 또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고 광복군의 인적자원을 풍부하게 만든 보충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일제에 항거했던 유일한 한인무장투쟁 세력의 원천이 바로 조선의용대 였다.

  • 전시공간 5 미리벌의 분노와 희망
    전시공간5

    예로부터 풍요와 넉넉함의 상징이었던 미리벌은 약탈과 수탈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품질 좋은 쌀은 일제 강도의 표적이 되엇고, 고율의 소작료와 수리세 등의 명목으로 빼았겼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미리벌의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모두 일제에 대한 저항의 투지를 불태었다. 이 곳에는 교육과 사회운동,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학 등 각 분야에서 하나로 뭉친 미리벌의 분노, 그리고 해방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 전시공간 6 내일을 향해 흐르는 남천강
    전시공간6

    '해방 그리고 밀양 그 이후'라는 부제가 눈에 띄는 이 전시공간은 해방 이후 밀양으로 돌아온 약산 김원봉의 행적과 2001년 석정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밀양 지역에서 독립운동가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하는 과정, 최후의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의 밀양 방문을 통행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성지 ! 밀양을 다시 재조명하고 있다. 김학철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은 '밀양'을 자신들의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밀양'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삶을 돌아보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