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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가구수/인구수

가구수/인구수
가구수 인구현황 면적
1,922 3,570 1,763 1,807 48.2㎢

지역특성

초동면은 낙동강 유역의 넓은 평야지대로 토질이 비옥하여 농업이 잘 발달되어 있고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인근 부산, 마산, 창원의 대도시와 30분거리고 연결되어 있어 초동농공단지의 물류소통에 매우 편리하여 농업과 공업이 조화롭게 성장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풍속과 전통이 살아 있어 인심이 온후하고 인정이 많은 고장임.

행정구역

24개리, 52개반 52개자연마을

조직 및 업무(담당별 업무분장)

조직 및 업무
담당별 담당업무
총무담당 서무, 회계, 통계, 선거, 공보, 청사관리, 민방위, 문서 체납세징수, 자동차세, 종합토지세, 제증명, 건설, 도시, 재난관리, 환경
주민생활지원담당 기초생활보장수급자 , 자활사업, 장애인복지, 아동복지, 노인복지
민원담당 주민등록, 호적, 제증명, FAX민원
산업경제담당 축산, 농수산, 농지, 산림

마을약사

  • 삼한시대에는 미리미동국이라는 부족국가로 추정되고 변한이 땅으로 가락국에 속하였다가 신라지증왕때(505년)산라영역에 편입되어 추화군이 되었다가 경덕왕 16년(757년) 밀성군에 속하였음.
  • 고려성종 14년(995년)밀주군으로 개칭되어 밀주군에 속하였다가 충렬왕 11년(1258년) 밀성군에 속하였으며, 공양왕 2년(1390년) 밀양부에 속함.
  • 조선태종 15년(1415년) 상서면으로 불리우다 영조 45년(1796년) 상서초동면으로 되었다가 고종32년(1895년) 초동면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유물ㆍ유적

가례부췌책판(家禮附贅冊板)

  •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제 제267호
  • 규 모 : 131판
  • 소 유 자 : 안재우
  • 재 료 : 목판
  •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금포리 167
  • 시 대 : 조선시대(1899년)
이 가례부췌(家禮附贅) 6권 3책은 선조와 인조년간을 살았던 오휴자안신(1596-1648)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으로 느슨해진 예를 고취시키기 위해 주자가례를 근거로 하고 동유의 예설을 기술하여 간행한 것으로 인조6년(1628년)에 만들어졌다. 이 책의 편재는 처음 저자의 서문이 붙어있고 다음 교정시 범례와 30여종의 인용도서목록이 있다. 권 제1에는 통례사당, 부췌별록, 거가잡의, 권 제2에는 관례, 혼례, 견구고례 권 제3에는 상례 권 제4에는 상례치장 권 제5에는 상례노제, 줄곡, 소상, 대상, 치부존장 권 제6에는 제례사시제, 묘제 등으로 나누어 실려있다. 영조 34년(1785년)에 이를 간행하고자 순암 안정복의 발문을 얻었으나 당시에 간행하지 못하고 광무3년(1899년)에 그의 10세손 안상진에 의해서 간행된 것이 현재의 책관이다. 저자 안신의 처음 이름은 국보였고 자는 대지, 호는 오휴자로 임진왜란때 세운 공으로 조정에서 군기사부정을 주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동화음자해라는 저서도 남겼는데, 순암 안정복이 행장을, 성호 이익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시문집인 오휴자집 1책이 전해오고 있다.

밀양 오방리 강동구(密陽 五方理 江東邱)

  •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기념물 제120호
  • 소 유 자 : 창녕조씨문중
  •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353-4, 범평리 513-2
  • 규 모 : 2기
  • 시 대 : 조선시대
강동구는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동네밖의 한길가에 위치한 흙으로 쌓은 둔덕이다. 취원당 조광익(1537-1578)의 효행과 아우인 지산 조호익(1545-1609)과의 우예를 기리고 뒷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조성한 표식이다. 조광익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본관은 창녕, 창원시 북면 지개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가회, 호는 취원당인데 증조부는 인조때의 청백리인 치우, 아버지는 윤신, 어머니는 조선판서를 지낸 장말손의 손녀이다. 퇴계이황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명종13년(1558년)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선조8년(1575년)에 최황이 경상도도사로 부임하여 군적을 정리할 때 당시 감독에 임명된 아우 조호익에게 50명을 독납토록 지시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최황은 항명으로 몰아 세워 급기야는 그를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를 보내었다. 이렇게 되자 조광익은 선조11년(1578년)에 강동으로 좌천된 아우를 만나려고 평안도 부사의 직책을 얻어 내려갔다가 이내 병을 얻어 42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이곳 오방리에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강동의 많은 백성들이 형제의 우의를 감복하여 흙을 짊어지고 조문하러 천리길을 왔으나 이미 장사를 지낸 후이므로 가지고 온 흙으로 둔덕을 쌓고 대나무를 심어 표적을 하였던 것을 강동구라 하였다. 선조임금은 우애를 가사히 여겨 정문을 표창하고 『삼강행실도』에 수록토록 하였다. 그리고 비각은 1834년 후손들에 의해서 둔덕앞에 세웠다.

송은 박익선생 문집책판(松隱 朴翊先生 文集柵板)

  •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제 제351호
  • 소 유 자 : 밀성박씨 송은공파 문중
  •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20번지
  • 규 모 : 목판(5㎝×30㎝)42매
  • 시 대 : 조선시대(1837)
초동면 신호리에 있는 모선재에 보관중인 이 문집 책판은 고려말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송은 박익(1342-1398)선생의 유고시문집을 1837년(현종3년)에 판각한 것으로 총4권 1책(본래 45매였으나 1995년경 2매 분실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송은 선생의 유문 6편과 시31수를 비롯하여 이색, 길재, 변계량 등과 화수한 시와 김맹성, 정도전, 조준에 대한 애도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은선생의 본관은 밀양, 자는 태시, 호는 송은, 초명은 천익으로 판도판서를 지낸 은산 부원군 문헌공 박영균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능주구씨로 좌정승구위의 딸이다. 송은 선생은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 예부시랑, 중서령, 세자이사 등의 벼슬을 거쳤고, 여러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포은, 도은 등과 친숙하였다. 고려두문동의 귀은제로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72현중에도 9은으로 손꼽힌다. 1395년(태조4년)에 조선 조정에서 선생에게 여러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특히 선생의 시풍은 청랑고고하여 은일의 뜻이 잘 나타나 있는데,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고려 충신임을 자처하는 감회가 짙게 베여 시정이 더욱 견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모선정(募先亭)

  •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85호
  • 소 유 자 : 밀양박씨 송은공파 종중
  •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20번지
  • 규 모 : 1동
  • 시 대 : 조선시대(1500)
초동면 신호리에 있는 모선정은 성종조때 점필재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았던 모선정 박수견이 친상을 당해서 시묘3년을 마치고도 귀가하지 않고 묘소에서 곡읍으로 몸을 바치니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여 여묘실을 모선정이라 한데서 이 정각의 유래가 되었다 1500년(연산조 6년)초에 모선정이 창건되고 주위의 산천과 동명을 <모선>으로 칭하여 박수견의 효행을 기려왔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버렸던 것을 150년이 지난 영조년간(1742-1776)에 이르러 9세손 덕계 박증엽이 지금과 같이 단층 팔작지붕의 목조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중건하였다. 1833년(순조33년)에는 모선정 경내에 고려말 두문동 72현중의 한사람인 충숙공 송은 박익과 그의 아들 우당 박융, 인당 박소 형제 등 3부자를 봉안하기 위해 사림의 중론을 모아 덕남사를 창건한 후 덕남서원이라 승호하여 향사를 받들어 왔는데,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덕남서원이 철폐되자 소은 선생의 초상만을 별묘에 모시고 봉사해 오다가 1933년에 영당을 건립하여 이건하였다.

변계량비각(卞季良碑閣)

  • 지정번호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7호
  • 소 유 자 : 밀양시
  • 소 재 지 :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04-2
  • 수 량 : 1동
  • 시 대 : 근대(1946년)
초동면 신호리 대구마을 입구 큰길가에 있는 이 비각은 일명 변씨3현비각이라고 불리우는데, 고려말 판서 변옥란과 그의아들 춘당 변중량, 춘정 변계량등 삼부자의 성장한 곳과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946년에 후손들이 그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판서 변옥란(1322-1395)은 고려말에 3판서를 역임하고 태조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춘당 변중량(1352-1398)은 태조때 좌승지를 역임한 문관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춘정 변계량(1369-1430)은 춘당의 아우이며 조선조 건국초기에 여러 요직을 거쳐 일국의 대문장가로써 20여년을 종사하였으며, 특히 세종의 문치시대에는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의 개수는 물론 크고 작은 외교사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임금을 잘 보필하여 문장과 덕업이 찬란하였다.

동대

대구말 남쪽에 있는 대구말 안산으로서 일명 동대산이라고 한다. 춘정 변계량선생이 유능 인사의 교육 및 회의 장소로 삼았고 겸하여 영남일대의 통신망으로 이용한 봉수대가 있어서 동대라고 전해짐

이궁대

곡강마을 뒤에 있는 산에 위치하며 밀주지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지증왕때 낙동강 건너 가야를 정벌하고 이사부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대가야를 치고 남쪽으로 가락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을 친 곳이라고 전한다. 그 뒤 법흥왕때 가락의 구형왕이 이곳에 와서 항복하였다고 전한다. 또 누세에 신라왕이 이곳으로 임어하여 선적을 기렸으며 순행유연하는 장소를 만들어 이궁대라 명명했다고 전해짐.

덕대산성과 흙무덤

덕대산 정상부에 성터가 남아 있는데 신라때 덕녀가 왜구를 방어하던 곳이라고 하여 덕대산 혹은 덕성산으로 불렀다고 함. 이 산의 정상부는 분지형으로 평평하고 산의 형세대로 타원형의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았으며 그 둘레는 약 2㎞ 폭은 1.8m 높이는 3m 정도가 되는데 거의 허물어지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석축이 남아 있음. 이 산성의 축성연대는 3-4세게경으로 추정되며 낙동강 좌안의 요세로 왜구의 방어와 가야제국의 정벌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시때까지 국방상 중요한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처가 되어 지금까지도 가뭄에는 비를 비는 풍습이 전래되고 있다. 성내에는 주민들이 처자묘라고 부르는 큰 흙무덤이 있는데 장가 못간 노총각이 음력 8월에 벌초를 하면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장가를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자라목(오산)

초동면 두암리 모래들 마을에서 초동면 금포마을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모래들 마을 뒷산에서 동쪽으로 볼록하게 나와 있는 나지막한 산으로 마치 자라목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밀주지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신라왕이 이궁에 와서 수산제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이곳에서 머물던 곳이었다고 하고 고려시대에는 김방경이 려원연합군과 함께 일본으로 원정하기 위해 이곳에서 진을 치고 군수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밀주징신록에는 오산조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는 낚시터로 이용되기 하였던 곳으로 추정됨.

민속놀이ㆍ전설ㆍ민요 등

장재늪 전설

반월 본동(내촌)마을 서남쪽 청도천 제방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낙동강의 제방을 축조하면서 다 없어지고 그 위치만 전한다. 이 장자늪에 얽힌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엣날 이곳에는 장자인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인정이 없어서 이웃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해도 남을 도울 줄 몰랐다. 어느날 스님 한 분이 부자를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그러자 머슴을 시켜 거름을 한 삽 떠 오게 하여 스님의 시주그릇에 담아주고는 대문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 광경을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며느리가 몰래 물길러 가는 척하고 물동이에 쌀을 담아 가지고 나와서 대문 밖에 서 있는 스님에게 가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고 스님의 시주 그릇에 쌀을 넣어 주었다. 그러자 스님은 장자의 며느리에게 이르기를 이 길로 바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뒷산으로 올라 가라고 하면서 절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산으로 올라갔다. 며느리가 뒤산 중턱에 올라 갈 즈음에 갑자기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며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 같았다. 며느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 순간에 돌이 되어 버렸고 그 부잣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반달같은 큰 늪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 늪을 원늪 혹은 장재늪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훗날 이 늪에서 고리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면 기와장 또는 놋그릇 등이 그물에 걸려 올라 온다고 전한다.

신호마을 서낭당(성황당)

신호리 백뫼 마을내에 신호마을 서낭당이 있다. 1865년 대홍수 때 마을 앞에 있는 바위 밑에 상자가 떠내려와 있는 것을 발견하여 열어보니 갑주, 칼, 옷 등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공의로 신당을 건립하여 서낭당이라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매년 음력 정월에 기풍안택하는 고사를 지낸다. 갑주, 칼, 옷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소진되었고 옷은 원형대로 복제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성황복은 사방 4m정도의 베에 꼬리가 달렸으며 청룡, 황룡이 여의주를 감싸고 있는 그림에 방향표시가 기재되어 있으며 청나라 연호부터 시작하여 수십회 복제한 기록이 남아 있음.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닭실골

범평리 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며 이곳은 음력 섣달 그믐날 저녁이 되면 닭이 운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이 때 닭이 우는 지점을 알수가 없다고 하는데 바로 그 지점이 명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말방아들

봉황리 앞에 있는 들판이다. 현 초동면 와지마을의 자리에 엣날 석씨 일족 중에서 만석꾼이 한 사람 살았는데 이 사람은 재력을 믿고 어떤 사람이 와도 늘 자네라고 통칭하여 별명을 “자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사람의 선조묘가 안산(초동면 장터고개가 있는 곳)에 있었는데 그 묘의 음덕을 입어 만석꾼의 부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데 석부자는 부를 누려도 너무 인색하여 남을 도울 줄 몰랐다. 과객 접대는 물론 시주 온 스님까지도 문전박대하니 여러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 하루는 어느 도사가 와서 보고 석부자의 버릇을 고치려고 부귀를 누렸으니 공명도 누려보라고 권유하면서 안산에 있는 선조묘를 이장토록 했다. 날을 받아 면례를 하기 위해서 묘를 파헤치니 말이 옥동자를 태워 하늘로 날려고 하는데 그때 옥동자는 한 쪽 다리만 말안장에 걸치고 있었고 또 한 쪽 다리마저 올리려고 하는데 말이 하늘로 올라가 옥동자는 그 자리에서 떨어져 죽고, 말은 이 들에 앉았다고 한다 그 뒤 석씨네는 패가해서 이 마을을 떠났고 말이 날아서 앉은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 말방아들이며, 말이 앉은 자리는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본문 콘텐츠 담당자, 최종수정일

담당자
초동면 055)359-6743
최종수정일 :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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