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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가구수/인구수

가구수/인구수
가구수 인 구 현 황 면 적
2,869 5,894 2,985 2,909 55.3 ㎢

지역특성

  • 부북면은 밀양시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의 주산인 화악산이 면의 북쪽에 위치 하여 경북 청도군과 경계를 하고 그 능선을 따라 남동쪽으로는 상동면과 북서쪽으로는 청도면이 있으며, 남으로는 종남산 봉우리를 경계로 하여 상남면과 남서쪽으로는 초동면과 접하고 남동쪽으로는 내이동과 교동이 인접하여 면의 가운데로 감내천이 흘러 밀양강과 만나 강을 경계로 삼문동과 인접하고 있어, 1개도, 5개면, 3개동에 둘러 쌓여 남북으로 길다란 지형으로 국도24호선이 동서로 관통하고 있음
  • 시설농업으로는 포도, 딸기, 풋고추, 들깻잎이 재배되고 있으며, 용지리에 한국화이바 그룹과 사포공단, 사포산업단지, 제대농공단지, 춘화농공단지 조성 등 공업과 농업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풍요롭고 살기 좋은 지역임

행정구역

22리 52반 51개 자연마을

조직 및 업무(담당별 업무분장)

조직 및 업무
구분 담당업무
총무담당 총무, 기획, 동향, 선거, 문화관광, 체육, 통계, 회계, 지방세전반, 국공유재산, 토목일반, 재해, 환경, 광고물
주민생활지원담당 사회복지전반, 보건, 마을회관관리
민원담당 가족관계등록, 인감, 주민등록, 제증명, 민방위
산업경제담당 농정, 산림, 지역경제, 교통행정, 작물재해

유물,유적

도지정문화재

예림서원(禮林書院)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 제79호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179번지에 소재하는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9호로서 조선시대(1567년)의 건물로 정면 5칸,측면 2칸의 목조기와인 예림서원(禮林書院)은 영남(嶺南) 유림의 종장(宗匠)인 점필재(店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사숙(私淑)하던 후학들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은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선생(文忠公 店畢齋 金宗直先生)을 주벽(主壁)으로, 증 도승지 오졸개 박한주 선생(贈 都承旨 오拙齋 朴漢注先生)을 동쪽에, 처사 송계 신계성 선생(處士 松溪 申季誠 先生)을 서쪽에 모시고 밀양 유림(儒林)에서 매년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본래는 명종 22년(1567년)에 당시 부사(府使) 이경우(李慶祐)가 밀양 유림의 요청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자문을 받아 자씨산(慈氏山) 아래 영원사(靈源寺) 옛터인 덕성동(德城洞) (지금의 밀양시 용활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고 불렀는데, 인조 13년(1635년)에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禮林里)로 옮겼다가 숙종 6년(1680년) 묘우(廟宇)가 소실되어 다시 지금의 부북면 후사포리(後沙浦里)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강제 철거된 바 있으나 고종 11년(1874년) 향사림(鄕士林)의 노력으로 강당(講堂) 5칸과 동서제 (東西薺)등 부속건물을 중건 보수하였고 1945년 광복(光復)후에 사액(賜額) 현판을 다시 달았는데 건물은 육덕사(育德祠), 정양문(正養門), 강당, 동제, 서제, 양몽제(養蒙薺), 독서류(讀西樓)등이 있다.

점필재문집책판(店畢齋文集冊版) 및 이존록(彛尊錄)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5호

점필재문집판

영남사림학파(嶺南士林學派)의 개조(開祖)인 점필재(店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시문을 모은 문집책판이다. 이문집은 성종 24년 (1493년)에 그의 생질이며, 제자인 강중진(康仲珍 : 홍문관 수찬 康伯珍의 동생)이 선생의 초고를 모으고 저자(著者)의 문도(門徒)인 송계(松溪) 조위(曺偉 : 점필재의 처남)에게 편집을 부탁하여 만든 원고가 성종(成宗)이 보신후 미처 간행 하지 못한 터에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하여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강중진(康仲珍)이 다시 나머지 글을 모아서 중종 12년(1520년)에 선산(善山)에서 당시 군수의 협조로 목판(木板)으로 간행한 것이 초간본(初刊本)이다. 그 뒤 여러차례의 수정, 보완, 교정, 보각(補角)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시집(詩集)23권, 문집(文集) 2권, 도합 25권이며 년보(年譜), 무오사적(戊午事蹟), 문인록(文人錄) 등이 부록으로 붙어 있고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보존되고 있다.

이존록책판

이 책판은 김종직의 부친인 강호(江湖) 김숙자(金淑滋 : 1389-1456)의 가계(家系), 사적(事蹟) 언행(言行)등에 관한 기록으로, 한 사대부(士大夫) 가문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사료(史料)인데, 점필재가 직접 저술(著述)하고 송계(松溪) 조위(曺偉)가 서문(序文)을 강백진(康伯珍)이 발문(跋文)을 썻다. 김종직의 외조부 박홍신(朴弘信)과 첫째부인 박(朴)씨의 행장을 덧붙인 책으로 상.하 양권(兩券) 1책 71장(張)으로 되어 있는데 연산군 3년(1497년)에 발간한 것은 임란(壬亂)때 불타없어지고 이후 1709년에 중간(重刊), 1892년에 삼중간(三重刊)하여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보관 중이다.

성호선생문집책판(性湖生文集冊版) (퇴로본)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7호

성호(星湖)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자(實學者)인 성호(星湖) 이익(李溺 : 1681-1763)을 일컫는 말인데, 이 문집(文集)은 영조 39년(1763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년)에 그의 종질(從姪)인 이병휴(李秉休)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그 뒤 순조 27년(1827년)에 하려(下慮) 황덕길 (黃德吉)이 성호(星湖)의 증손(曾孫)인 이재남(李載南)과 함께 정리했으나 완성을 못하고 말았고, 고종 27년(1890년)에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와 물헌(勿軒) 이명익(李明翊)이 27책(冊)으로 선정(選定) 편집(編輯)한 것이다. 이 27책본 성호선생문집 판본 간행은 1916년에 소눌(小訥) 노상직 (盧相稷), 성헌(省軒) 이병희(李炳憙), 안화진(安和鎭), 이병곤(李炳鯤), 금주(錦州) 허채(許採) 손태헌 (孫台憲)씨 등이 퇴로(退老)의 서고정사(西皐精舍)에서 문집간행(文集刊行) 결의후, 그 이듬해인 1917년에 완성을 했다. 160여년이나 출판되지 못하고 상자속에 들어있던 성호(星湖)의 문집이 이러한 밀양의 인사(人士)들에 의해서 간행(刊行)될 수 있었던 것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한 성재(性齋) 허전(許傳)등이 성호(性湖)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그 간행(刊行)을 제자(弟子)들에게 적극적으로 부탁했기 때문이다.

성호선생문집책판(性湖生全集冊版) (사포본) -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8호

성호(性湖) 이익(李瀷 : 1681-1763)의 문집 26책(冊)을 새긴 책판(冊版)이다. 밀양 퇴로(退老)에서 1917년에 "성호선생문집) 27책본을 간행한 후 다시 1922년에 성재(性齋) 허전 (許傳)의 제자인 안희원(安禧遠)이 전집(全集) 36책(冊)으로 간행한 것이 곧 이 책판(冊版)이다. 27책본 같이 성현의 문적을 선택해서 간행할 수는 없으니 그 전집을 간행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출판된 것인데 퇴로본의 증보판(增補版)이라 할 수 있다. 안희원은(安禧遠)은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분인데 이 일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고 그 제자들이 계승하여 1922년에 완간(完刊)하였다. 이것을 세칭 "36책본" 또는 사포본(沙浦本)이라고 부른다.퇴로에서 간행된 "27책본"을 『성호선생문집본』이라고 부르고, 이 36본은 『성호선생전집본』 이라 부르는데, 이 문집 간행의 진행과정과 출연자(出演者)의 이름과 금액이 기록된 모현록(慕賢錄) 이 함께 전해진다.

도지정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

유래

이 놀이는 밀양 감내(甘川)에서 오랜 예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민속 상원놀이의 하나로서 그 유래는 원래 감내에 “게”(경상도 말로 일명 끼)가 많아 웃감내(상감)와 아랫감내(신흥)가 서로 “게”잡이를 하는데 좋은 자리(터)를 먼저 차지 하려고 하는데서 비롯된 놀이이다. 옛날에 이곳 감내에서 게가 적게 잡힐때는 서로 웃감내 아랫감내 사이가 좋았으나 게가 많이 잡힐때부터 서 로 욕심을 부려서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에서 인심이 나빠지게 되어 이것을 막기위해 마을 어른들이 「게」모양의 줄을 만들어서 줄을 당겨 이긴쪽이 좋은 자리를 차지 하도록 한 것이 유래가 되어 오 늘에 이어져 오고 있으나 지금은 마을에서 이 놀이가 행하여 지지는 않고 도지정문화재 제7호 로 지정되어 보 존 전승되어 오고 있음

놀이의 특성

내용

: 앞놀이에서는 게줄당기기 준비를 하고 이어 게줄당기기를 해서 승부를 겨루며 뒷놀이로 이어져 화 합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름

놀이의 순서

입장 - 당산제 - 터밟기 - 젖줄(작은줄)다리기 - 농발이놀이 - 터빼앗기 - 춤판 - 게줄당기기 - 판굿

놀이의 구성

  • 당산굿 : 게줄을 당길때는 게잡이를 하는 이권도 있었으나 그 시기가 정월보름과 7월백중때가 되므로 자연 히 농가에서는 1년동안 마을의 안녕과 농사가 잘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온갖 치성을 다 드리게 되 는데 이곳 감천에서는 서방의 당산이 있어 색다른 고사를 지낸다.
  • 농발이놀이 : 당산굿으로 마을의 안녕과 필승을 비는 치성을 드리고 판굿 으로 한바탕 놀면서 “神”을 울 을 울린 다음 농발이놀이로 장사 줄다리기 역군울 뽑는다. 이때 首農夫를 손가마에 태우고 나무구 시(소죽통)와 지게목발 장단에 흥겨운 춤과 노래(밀양아리랑)로 사기를 북돋운다.
  • 터빼앗기 : 춤판이 끝나면 이어 터빼앗기를 하는 발(竹簾)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싸움은 수농부끼리 작은 줄을 당기기도 하고 “미지개”를 할 때도 있다. 이 터빼앗기 싸움에서 이긴편은 줄다리기에 유리 한 자리를 차지 하게된다 발싸움이 끝나면 젖줄 다리기가 시작되고 젖줄다리기가 끝나면 각기 농악을 선두로 장내를 뛰놀 다가 게줄쪽으로 가서 원줄(게의 몸둥이 부분)에 걸어 맨다. ◎ 게줄당기기 : 줄도감이 울리는 징소리에 따라 시작되는데 줄은 양쪽 각각25명이 작은줄을 메고 하나둘 해 서 백까지 헤아릴 동안(약3분)다리는데 중앙에서 많이 끌고간 편이 이긴다.
  • 판굿 : 이 놀이는 게줄당기기에서 진편은 앉고 이긴편은 쾌재를 부르면서 장내를 돌다가 진편을 일어켜서 화동하는 춤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도지정 문화재 자료

박양춘여표비각(朴陽春閭表碑閣)

박양춘여표비각 경상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195호인 이 비각은 모헌(慕軒) 박양춘(朴陽春 1561~1631)의 출천지효(出天之孝)를 기념하여 1912년에 향중 사람들이 모헌의 유허(遺墟)에 이 여표비(閭표비)를 건립하고 비각(碑閣)을 세웠다. 모헌은 명종 때 효행으로 호조참의 (戶曹參議)에 특별히 재수된 성재(惺齋) 박항(朴恒)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밤에는 시묘(侍墓)하고 낮에는 어머니를 찾아뵙는 일과를 거러지 않았는데, 하루는 폭우가 쏟아져 광탄(廣灘)이 세어 건너지 못하고 울부 짖고 있을 때 갑자기 강물의 흐름이 중단되는 이변이 일어났고, 임진왜란중에 조모와 어머니의 상(喪)을 함께 당하였으나 병화(兵禍)를 피하지 않고 밤 낮으로 호곡(號哭)을 하므로 모헌의 효의(孝義)에 감복한 왜장이 그집을 표시하여 외병의 침입을 막아준 일화도 있다. 그 왜장이 지극한 효성을 기리어 출천지효(出天之孝)라는 문자를 써서 정표(旌表)한 것이 이 여표비(閭表碑)의 시초이다. 비석의 제액(題額)은 모헌박선생여표유허비명병서(慕軒朴先生閭表遺墟碑銘幷序)라 하였고, 비문은 탁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지었으며, 진사(進士) 안종석이 글씨를 썼다.

퇴로리이씨고가(退老里李氏古家)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2호

퇴로리이씨고가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19번지에 소재하며 퇴로리에 거주하는 여주(麗州) 이씨(李氏)의 종택(宗宅)으로 조선조 후기인 1890년에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건립하여 100여년 동안 5대에 걸쳐 보존된 전통적인 고가(古家)이다. 이집은 기와를 얹은 흙담장으로 구획된 부지에 남향으로 지은 목조 기와집으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정침(正寢)과 중사랑(中舍廊), 그리고 별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홑처마에 팔작(八作)지붕으로 "청덕고가(淸德古家)"라는 당호(堂號)가 있는 집이다. 중사랑은 아들인 성헌(省軒) 이병희(李炳喜) 거쳐하면서 독서 하던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며 "성헌(省軒)"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벽채에도 내당과 외당이 있는데 "쌍매당(雙梅堂)" 죽려지실(竹濾之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동서익랑(翼廊)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이며 그 밖에도 후원(後園)에는 가묘(家廟)가 있고 조화롭게 정원이 꾸며져 있다. 이 종택(宗宅)의 담장 밖에는 일문(一門)의 제숙소(劑宿所)인 천연정(天淵亭 : 원래는 報本堂)이 있고, 서촌에는 항재, 성헌 부자의 서고정사(西皐情舍)와 한서당(寒棲堂)이 있다.

청운리안씨고가(靑雲里安氏古家)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3호

청운리안씨고가 부북면 청운리에 있는 광주(廣州) 안씨(安氏)의 고택(古宅)으로 조선조 말기 경상도 지방의 상류가문의 건물이다. 1840년대에 의관(議官) 안붕원(安鵬遠)이 이곳으로 옮겨온 뒤 그 아들 훈재(塤齋) 안종문(安鍾文)과 호재(호齋) 안종익(安鍾翊) 형제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효우(孝友)를 독실히 하고 가정을 일으킨 결과 한때는 3천석의 수곡(收穀)을 받는 큰 지주(地主)가 되었다. 건물의 배치 상태는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내당(內堂)과 좌우의 별채, 사랑채, 좌측별채에 연접한 중문채 등으로 구(口)자형을 이루었고 외정(外庭)에는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에 조산(造山)을 중심으로 정원을 꾸몄으며 좌우에 있었던 행랑(行廊)과 창고등의 건물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이 고택은 1870년대에 안종문이 정침과 좌우에 별채 2동, 대문 등을 지었고, 1890년경에 그의 아들 안동수(安東洙)가 사랑채, 행랑채, 창고, 바깥대문 등을 충축했다. 정침(正寢)은 내정 중앙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가운데 2칸의 마루와 좌우 1칸씩의 방이 있고 동편에 부엌이 딸린 5칸 2열의 팔작지붕이며 오른쪽에 대청이 있고 왼쪽에 방을 두었다. "화납정사(華南情舍)"라는 당호(堂號)와 "인지위덕(認之爲德)"이란 편액(扁額)이 대청 도리에 걸려 있으며 마루 뒤쪽에는 판자벽을 두고 창문과 툇마루를 두어 내정과 연결 하였다. 정침과 사랑채 전면에 유리를 끼운 격자 여닫이 문을 장치 하였으나 당초의 구조가 아니며 후일 개수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의첨재(依瞻齋)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0호

의첨재 의첨재(依瞻齋)는 부북면 오례리에 있는 함평(咸平) 이씨(李氏) 제숙소(齊宿所)이다. 광해군때 무과(武科)에 올라 호군(護軍)을 지낸 이선지(李先智)가 어머니의 묘소 아래에 의막(依幕)을 짓고 살던 집이 였는데 집터만 남아 전해오던 것을 후손들이 숙종 년간(1674-1720)에 제살(齊室)로서 중창하였다. 그후 수차례에 걸쳐 건물을 수축해 오다가 고종 34년(1897년)에 종손인 이만헌 (李萬憲)이 종중의 의견을 모아 현재와 같이 중수(重修)하였다. 정당(正堂)은 높은 축대위에 건립된 5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방을 설치하였는데 왼편에 1칸, 오른편에 2칸이다. 정당의 맞은편 입구에 대문채가 있는바 좌우에 행랑방(行廊房)과 부엌이 각각 붙어 있고 가운데에 우뚝한 솟을대문이 설치되어 3문(三門)의 형식을 갖춘 고자사(庫子舍) 겸용의 건물 이다. 정당의 뒷편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는데 본래 이선지가 살던 8칸 정침의 집터로 전해오며, 최근 주춧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당에는 안동인(安東人) 김녕한(金寗漢)이 지은 "의첨재기(依瞻齋記)"가 붙어 있다.

양양지(陽良池 : 일명 위양못)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67호

양양지 부북면 위양리의 동쪽에 있는 양양지(陽良池)는 신라시대에 축조된 제방(堤防)의 둘레가 4.5리(里)에 달하는 저수지였으나 원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수리구역 (水利區域)의 제방으로 바뀌어 제방 길이가 547척(尺), 너비 68척(尺)으로 줄어 들었다. 양양제(陽良提) 제방 위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일문의 제숙소(薺宿所)인 완재정(宛在亭) 이 있는데, 원래는 못 가운데 다섯 개의 섬이 있었으며, 이 저수지의 물로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에 물을 대어 농사를 지었고, 제방위에 각종 나무를 심어 인위적으로 풍치(風致)를 가꾼 명소(名所)였던 것 같다. 밀주구지(密州舊誌) "위양동 조(位良洞 條)에 의하면 인조 12년(1634년)에 임진왜란으로 훼철(毁撤)된 제방을 부사(府使) 이유달(李惟達)이 수축(修築)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완재정(宛在亭) -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633호

양양지 선조(宣祖) 10년 9월에 산청 단성에서 태어난 학산(鶴山)선생은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왜적에 항거하고 후학양성에 전념(專念)하여 주위사람들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공(公)은 동네 앞 못(陽地)을 거닐며 못 가운데에 정자를 지어 손님을 맞이하고 후손들이 공부할 수 있으면 하고 이름을 완재(宛在)로 명명하였다. 공의 후손들이 공의 뜻을 받들어 300년 지나고 나서 못 복판 다섯 섬 중에 하나를 골라 집을 짓고 완재정(宛在亭)이란 현판을 달고 지금까지 왔다. 그 완재정(宛在亭) 주위에 이팝나무 필 무렵에는 경관이 좋아 밀양 팔경(八景)에 들어가고 많은 사람이 구경하기 위하여 모이고 있다. 매년 오월(五月)에는 학산(鶴山)선생의 높으신 학덕(學德), 지극하신 효심(孝心), 지대하신 충성심(忠誠心)을 가리기 위하여 고을 유림(儒林)이 주관하여 유계를 조직하여 뜻 있는 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완재정(宛在亭)은 2017년 3월 3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민속놀이, 전설, 민요 등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 府北面 : 府北面의 沿革에 대하여는 정확한 考證資料가 없어 확실치는 않으나 保存資料에 의하면 密陽都護府의 治所인 邑城의 北쪽에 위치하여 府北面으로 命名된다고 함
  • 華嶽山 : 밀양의 鎭山이며, 主峰의 높이는 999m정도이며, 주봉과 비슷한 또 한 봉우리가 동서를 나란히 솟아있고 그 등성이가 황소의 등을 발불케 하며, 두봉우리의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또 한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를 俗稱 작은 華嶽山(720m)이라고 한다. 화악이란 이름은 이 세 개의 봉우리의 형상이 중국의 五嶽의 하나인, 西嶽 즉 華嶽의 三峰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終南山 : 密陽府의 案山으로 남쪽에 있어 남산이 되었고, 종'字'는 옛날 큰 海溢이 있어 온 땅에 물이 덮혔는데 南山 꼭대기가 종지만큼만 남았다는 民譚이 있어 그 종지의 종'字'를 따서 終南山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唐나라 首都의 南山이 終南이였기 때문에 우리 서울의 南山도 終南이라 하였고, 이것을 모방하여 이 密陽府의 南山도 終南山이라고 했던 것 같다.

버스 시간표

밀양역에서 06:00부터 45분 간격으로 1일 18회 정도 운행하는 부북노선을 이용하면 된다.

본문 콘텐츠 담당자, 최종수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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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북면 055-359-6562
최종수정일 :
20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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